느리게 읽었다. 한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저절로 곱씹어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연민>에는 나와 흡사한 모습의(이것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할 것 같다) 남녀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심리적 모습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틀을 갖춘 이 소설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족하게도 자세히 알지도 못한다. 그저, 한 때 프랑스역사에 관심을 두다가 그의 저서인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책이 눈에 들어오게 됐다. 슈테판 츠바이크, 옛 교과서 어딘가에서 스치듯 만난 기억이 있던가? 그만큼 왠지 익숙하게 다가온다. 내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한 미력한 지식에 비해.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이라는 부제가 딸린 <연민>. 처음부터 이 책이 주는 느낌이 그리 간단치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책을 읽는 동안 인물들 모두에 대한 연민이 일어났다는 것에 약간의 놀라움을 표시해 본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인가에 대한 화두가 중요한 시점인 시대였다. 전쟁영웅이라 불리는 호프밀러가 사람들의 가식적인 면에 대해, 자신이 왜 영웅이 아닌지에 대해 ‘작가’에게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다.
그는 순간의 선택이, 아주 작은 순간의 실수가, 결말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자기의 경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거의 호프밀러의 심리적 묘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심리변화에 주된 원인을 제공하는 사건들과의 연관성이 치밀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장애를 갖고 있는 소녀 에디트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갖게 된 호프밀러. 그는 자신의 동정심 혹은 연민이라 불리는 감정을 조절할 줄도 몰랐고, 조절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순간의 감정에 따라갔고, 우유부단한 성격이 끝내 열정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한 소녀를 비극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은 결과가 되고 만다.
하지만 난 읽으면서 호프밀러를 처절하게 비난할 수도, 두둔할 수도 없었다.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순간의 감정만을 생각한 혈기왕성했을 청년의 실수를, 나는 마치 고결한 척하며 비난하지 못한다. 온실 속 화초마냥 자라온 에디트에게 호프밀러의 등장은 인생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디트의 그 열정적인 사랑은,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부담이 될 듯 싶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간절하다는 것을 읽는 동안 비참할 정도로 느꼈기에, 그 또한 무어라 충고어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들마다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며ㅡ가장 인간다우면서도 어찌 보면 쓸모없는(이렇게까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책을 보면서 한편으로 이런 면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감정인ㅡ연민이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연민은 양면이 모두 날카로운 칼입니다. 그걸 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은 연민에서 손을, 아니 마음을 놓아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 같습니다. 처음에만 환자를 위한 위로이고 치료제이며 약이 되지요. 그러나 이걸 정확하게 조제할 줄 모르고, 적당한 시기에 멈출 줄 모르면 독약이 되고 맙니다. -222p
병원에 며칠만 입원하면 알게 되는 사실이 하나있다. 의사들은 대부분-경험한 바에 한정을 두면-최악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희망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닥쳐올 가장 안 좋은 상황을 이야기하거나 좋은 징조도 100% 확신이 아닌 이상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섣불리 희망을 주고 그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했을 시, 닥쳐올 크나큰 좌절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 여겨진다. 그런 느낌은 경험하지 못하면 감히 논할 수 없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 그 감정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진정 모르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결국은 연민에서 비롯되는 이해이지 않을까. 연민은 이렇게나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 곳곳에 침투하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연민의 감정을 어디까지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서로가 상처받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그런 모든 감정들을 조절한다는 자체가 가능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감정이란 머리보다 먼저 반응을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후회하고 자책하기도 한다.
은연중 자격지심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막으로 연민을 내세운 것처럼 느껴지는 남자가 보인다. 과연 그 연민의 종착점이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으며, 바르게 가고 있었던 것일까. 책을 읽으며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주변사람들에게 이 연민이라는 것을 쓰잘머리 없이 유통하지는 않았는지. 사실 책을 읽고 난 후 내게 어떤 변화의 감정을 살짝 느꼈다.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것에 대해 원래 신중한 편이기는 하지만, 신뢰라는 것을 쌓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지 하는 의문. 조금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만 몰면 결국은 낭떠러지다. 균형이 중요한데, 그게 가장 어렵다는 게 은근히 미묘하게 다가온다.
<연민>을 읽는 순간 조용히 변화하는 내면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몇 번의 한숨, 몇 번의 웅크림...
연민
슈테판츠바이크 지음 | 이온화 옮김
지식의숲(넥서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오우디드(km2002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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