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길위의 미술관, 제미란의 여성 미술 순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올초에 읽었던 책 <미친년>을 통해 유숙렬 이프 출판위원장을 만났고, 그녀를 통해 페미니즘 잡지 '이프'를 알게 됐다. 그리고 얼마후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척박한 이땅에서 지난 10여년의 세월을 꿋꿋하게 버텨왔던 이프의 폐간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떤 잡지인지 한 번도 보질 못했지만 이땅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고 그녀들의 목소리를 담아왔던 잡지였다는 점에서 그 소식은 무척 안타까웠다. 그렇게 잡지 이프는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책을 통해서.

<길위의 미술관>은 잡지 이프의 아트디렉터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제미란이 이프에 페미니즘 여성 예술가들에 대해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라고 한다. 키키 스미스, 제니 홀처, 니키 드 생팔, 프리다 칼로 등 내로라하는 13명의 여성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이책은 '제미란의 여성 미술 순례'라는 부제처럼 그녀들의 작품들을 찾아 이리저리 길을 나선 저자의 미술기행이기도 하다.


책의 포문을 연 건 키키 스미스의 조각들이었다. 금기시되어 왔던 여성의 몸을 통해 관객에게 이양기를 건네는 그녀의 조각들은 미처 마음의 준비도 못한 내게 약간의 충격을 전해줬다. 리지아 클락의 퍼포먼스들은 글을 읽고 읽어도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고, 제니 홀처의 전광판 미술은(이런 장르가 있는지 이책에서 처음 알았다;) 텍스트를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의 매력을 맛보게 해주었다. 너무나 유명하다는 프리다 칼로, 진한 제비눈썹이 그려진 그녀의 작품들도 강렬했지만 그녀의 삶에 전체적으로 얽혀있는 연인 디에고와의 질기디 질긴 인연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재미있었던 꼭지는 프랑스 조각가 니키 드 생팔을 다룬 부분이었다. 밝고 경쾌한 색채와 둥글둥글 푸근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나나' 연작들은 참 사랑스러워 보고만 있어도 함께 밝아지고 기운이 차오른다. 소개된 그녀의 작품 중 '그녀(Hon)'는 잊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는데, 우리 모두는 결국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도발적으로 느껴지던 처음의 불편함은 사라지고 작가의 의도를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있다는 니키의 '타로 공원' 여행기였다. 험난한 여정을 거쳤지만 그곳에 가길 정말 잘 했다고 생각했던 저자의 마음을 책 속의 사진과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니키의 타로 공원에 꼭 가보고 싶어졌다.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답게 작가의 글 사이로 그녀들의 작품 사진들이 실려있다. 직접 보진 못하지만 책 속 사진으로나마 그것들을 접하고 함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다만 글에서 언급한 작품들 중 한두 작품의 사진만 실려있기에 나머지는 상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의 사진을 큼직하게 싣는 것도 좋지만 전시된 작품들을 직접 보지 못하고 책을 통해서 접하는 독자의 입장에선 다소 크기가 작더라도 다양한 작품 사진들을 실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속에서 저자는 작품에 대한 감동을 이야기하는데 정작 독자인 나는 그 작품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말 부지런한 독자라면 인터넷이라도 뒤져서 찾아보겠지만.

또한 현대 미술과 페미니즘 미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나는 처음에 책을 읽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저자가 들려주는 작가도 작품도 설명도 생소하고 어렵게만 느껴졌고, 쉽지 않은 문장과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소위 전문용어들 때문에 같은 문장을 몇 번씩 읽기도 했다. 또는 작품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해 헤매기도 했다. 그러다 니키 드 생팔의 부분에 이르자 저자의 딱딱하던 글들이 조금씩 편안하게 다가왔고, 글의 내용 또한 프랑스로 엄마 찾아 날아온 아이들이 출연 덕에 그전보다 생활의 감정이 묻어나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래서 니키를 다룬 글 이후론 재미있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등장하는 난해한 용어들은 마지막까지 나를 어렵게 했다. 조금만 더 쉬운 용어를 사용해 쉽게 써주었더라면 나같은 초보자들도 훨씬 더 즐거운 책읽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제미란의 <길위의 미술관>은 자주 접하지 못했던 페미니즘 미술 세계를 알려주는 창구같은 역할을 하는 안내서다. 프랑스, 독일, 미국, 남미 등 다양한 출신지역의 그녀들은 회화, 조각, 사진, 설치미술, 전광판 미술,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다. 거쳐온 삶의 길 또한 각양각색이다.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그녀들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찾는다면 그건 바로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길을 굳건히 걸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어렸을 때의 겪었던 고통의 기억들과 사랑과 배신으로 생긴 상처 등을 예술로 승화해내며 지금의 자리에 이른 그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설명하는 글이 아닌, 하나의 작품 앞에서 그걸 만들어낸 작가와 하나가 되어 온몸과 온마음으로 들려주는 글이기에 이책은 감동과 여운이 더욱 진하게 가슴에 남는다. 그런 이유로 제미란의 글은 조금 어렵지만 많이 새롭다. 요즘 많이 만날 수 있는 미술관련 입문서처럼 쉽게 술술 읽히지는 않지만(물론 수준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낯설고도 따뜻한 세계를 만나고 삶을 대하는 시선이 보다 넓고 깊어진다는 점에서 이책 <길위의 미술관>은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닐가 싶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햇살박이(tea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