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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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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도서관의 장르 소설 서가는 나의 보물창고였다. 그 중 다이아몬드는 스티븐 킹. 대출중이던 스티븐 킹의 도서가 반납되는 날이면 그의 책으로 무거워진 가방은 터보가 되어 나를 집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다.

초등학생 때 애거서 크리스티로 입문한 장르소설 탐독은 추리, 공포, 판타지로 넓혀가다 스티븐 킹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나의 우상이나 마찬가지인 스티븐 킹이 있게 한 책이라니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공포 영화 마니아인 나는 윌 스미스가 주연한 할리우드의 세 번째 《나는 전설이다》를 보기 전 꼭 원작을 먼저 읽어야 했다.


1976년 1월

대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독백과 묘사뿐이다. 짐짓 지루하기까지 하다. 스티븐 킹과 같은 문장력을 기대했지만 기대에 못 미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드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은근한 매력이 있다. 대체 왜 이 사람은 혼자 남았음에도 생존을 위해 투쟁을 하는 걸까, 이들은 뱀파이어일까 좀비일까? 가까이는 〈레지던트 이블〉부터 멀리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까지 좀비 영화의 장면들이 스쳐지나간다. 그런데 예상 외로 유혈이 낭자한 좀비들과의 전투는 없다. 로버트 네빌 -주인공 남자-은 이들을 피해다니고 방어하고 철옹성 같은 저택 안에 숨어 산다.


1976년 3월

점차 안개가 걷혀간다. 로버트 네빌이 왜 혼자 남았는지 알게 되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도. 로버트 네빌의 안개도 걷혀가기 시작한다. 대체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이들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로버트 네빌은 반 헬싱의 전설을 코웃음 쳐 버리고 과학으로 이들에게 접근한다. 마늘의 효능, 박테리아, 심리적 충격으로 인한 집단 최면까지. 로버트 네빌의 해답은 명쾌하다. 흡혈귀의 모호함은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이 사라진 이상 흡혈귀는 더 이상 초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가 된다. 그만큼 공포는 줄어들겠지.

로버트 네빌에게 친구가 생길 것 같다. 아직까지 감염되지 않은 개 한 마리. 그러나 살아있다는 것은 공포를 동반한다. 두려움에 떨던 개는 네빌과 친구가 되기 전에 떠나버리고 만다. 이제 그에게 남은 가장 큰 공포는 단조로움이다. 나는 차라리 나무가 되면 좋겠네.


1978년 6월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네빌은 여유가 보인다. 가장 위협적이던 흡혈귀 우두머리 코트만을 사냥하러 다니는 여유까지 보인다. 아마도 그것이 네빌이 살아있는 이유가 된 듯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났다. 생존자가 있다. 그것도 여자다. 네빌은 그녀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오래 외로웠던 그는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여전히 의심스럽다. 역시 나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1979년 1월
노란 표지의 싸구려 문학이었던 공포소설이 리처드 매드슨을 만나 장르문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아닐까. 흡혈귀, 또는 좀비가 나오는 자극적이고 저차원적인 공포 소설이 아니다. 소외받은 현대인의 심리적 공포를 빗대고 있다. 특히 남성의. 《나는 전설이다》 외에도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 10편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섬뜩한 현실이다. 공포소설/공포영화는 비현실적인 표양으로 포장한 가장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매체라고 생각해왔다. 그게 내가 공포**를 즐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리처드 매드슨은 훨씬 이전부터 그렇게 말해왔다. ‘이게 현실이다’라고.(글_ 박지연)


리처드 매드슨, 조영희 옮김, 황금가지, 2005년,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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