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 앞의 잣나무
정찬주 지음
미들하우스
이 책의 저자인 정찬주 선생님의 [암자로 가는 길]을 읽으면서 절을 찾을 때 일부러 암자를 찾아 가기도 했었다. 큰 절에 비해 작은 암자는 이끼 낀 고즈넉함이 있다. 운이 좋은 날에는 지장암에서 불공드리는 스님의 목탁소리에 마음을 맡길 때도 있다. 동자승만이 분주한 절집의 마루에 앉아 듣는 풍경소리는 또 얼마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지.... 불교를 종교로 본다면 나는 아마도 불교의 윤회사상이나 스스로 성불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에 적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오랜 동안 기독교의 영혼사상과 신의 심판 등 유일신적 흑백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안에 신은 하나님뿐이라고 말할 때면 내 영혼에 뿌리깊이 내려져 있는 기독교 사상에 대한 무한신뢰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스스로를 뒤돌아 볼 때가 있다.
그런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와 불교의 관계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나는 “불교를 종파라기보다는 하나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와 1600년의 전통을 함께 살아온 내 이웃이며 자연이며 존중이다”라고 말한다. 얼마나 추상적인가? 사후의 세계를 알지도 못하면서 윤회를 논하고 천국을 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이다. 그럼에도 내가 불교의 사상을 좋아하는 것은 윤회사상에서 보여주는 자연의 순환원리와 모든 생명을 상생과 조화, 존재의 가치를 존중하는 범신론적인 사유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을 세운 정도전은 이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료로 혹세무민이라며 불씨잡변으로 몰아 불교를 말살하고 성리학을 내세워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범신론의 만물평등사상 등 불교에는 여러 가지 해석을 가지고 있다.
유심론을 주장하는 선불교, 범신론을 주장하는 밀교, 화엄론의 우주론과 생명사상, 법화경의 구원사상, 금강경의 교만을 없애는 예지, 인간과 세계의 평화를 주장하는 대승불교, 인간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는 원각경, 인간의 초심리학을 다루는 유식불교 등. 여러 측면에서 해석되고 있으니 범부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암자를 따라 길을 찾던 불자(?)가 욕심이 생겼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니라.”
이런 선문답의 답을 찾아 나 같은 초심자에게는 조금 어려운 책에 손을 댔으니 말이다.
이 책은 ‘중국 10대 선사를 찾아 시작된 禪기행’이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5대손인 육조 혜능에 이르기까지 선사상에 대한 황금시대를 이루면서 이후 마조 도일, 운문 문언, 조주 종심, 임제 의현에 이르기까지 중국 10대 선사를 찾아 중국 대륙 2,000Km를 종단하는 영혼이 담긴 선순례기이자 자기를 찾아 떠난 구도기이다. 달마가 해로를 통하여 중국 광둥으로 들어온 시기를 서기 520~525년으로 추정한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양무제의 초청을 받아 현재의 난징으로 갔으나 기복적이고 현세 이익을 추구하는 당시의 불교와 선정에 들어 도를 얻고자 하는 자신의 수행관이 맞지 않음을 알고 뤠양을 거쳐 소림사로 숨어든다. 달마에게 도를 구하고자 찾아온 혜가에게 무관심하자 혜가는 달마에게 자신의 팔 하나를 잘라서 바친다. 달마가 한 질문은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쉽게 말해 ‘그대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운문 문언>은 이런 선문답을 한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다.”
“내가 하루 종일 말하였으나 한 자도 말하지 않았으며, 하루 종일 밥을 먹었어도 곡식 한 알도 먹지 않았으며, 종일 옷을 입고 있었어도 실오라기 하나 걸친 적이 없었다.”
“어디 갔다 오느냐.”
“차(茶)를 따고 옵니다.”
“달마는 몇 개나 땄느냐.”
선문답의 답은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쉽다.
선문답으로 얻은 깨달음은 너무 쉽게 보여 도무지 싱거울 때도 있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답에서 뜰 앞의 잣나무가 뜻하는 것은 일상에서 본래면목을 찾으라는 말이다. 그러니 잣나무가 됐든 측백나무가 됐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화두란 ‘지금 이 순간’에서만 존재하는 의미 없는 암호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답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정말 많은 갈래 중에 나는 또 한 길을 찾아 걸어갔다. 그 길의 답은 나에게 생소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했지만 한 번 찾아간 길이니 다음번에 찾아 갈 때는 조금 더 쉽게 찾을 듯하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목생화(bysp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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