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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마흐무드 다르위쉬 :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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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
마흐무드다르위쉬
아시아




                        십자가 위의 사랑 노래

온갖 작은 상처들의 도시여
내 손을 어루만져 주지 않으려오?
내게 가젤을 보내주지 않으려오?
내 이마와 ... 허파에서 연기를 털어내 주지 않으려오?!

그대 그리움 ... 타향살이
그대 만남 ... 유랑의 땅!
문마다 나는 두드립니다...
사람을 부르고, 또 묻습니다, 어떻게
별들이 진토(塵土)가 되어 버리는지를?

그대를 사랑하오, 나의 십자가가 되어 주오
그리고 원한다면, 비둘기집이라도, 되어 주오
그대의 손이 나를 녹인다면
나는 사막을 먹구름으로 채우겠소

내 사랑의 전부여, 그대의 사랑은 건포도 맛이오
피 맛이오
내 이마엔 지지 않는 달이 있소
그리고 불과 기타가 내 입 안에 있소!

사랑에 겨워 나 죽으면 나를 묻지 마시오
바람의 속눈썹이 내 묘지가 되게 하시오
진흙마다 내 그대의 목소리를 기르도록
싸움터마다 내 그대의 검을 꺼내 들도록

그대를 사랑하오, 내 십자가가 되어 주오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되어 주오
그리고 태양처럼 녹아 주오
내 가슴속에서... 무자비하게...

(가젤 : 사막에 사는 영양의 일종으로, 아랍 전통시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으로 쓰임)

1. 쓰는 이와 읽는 이

    마하무드 다르위쉬의 시집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이다. 스스로 유랑시인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시인의 시집에서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다르위쉬는 시적 표현에 있어서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말하기가 우선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의 시는 서사성이 뚜렷하다는 평도 받고 있다.

   말하기는 고백체일 수도 있고,  강렬한 의지가 채우는 결의일 수도 있다. 어느 시인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르위쉬는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후세 역시 국가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그러한 틀에서 자유롭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온몸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시집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을 읽으면서 일제의 강제점령기에 맹활약한 우리의 시인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읽는이 역시 자신이 속한 사회, 역사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빼앗긴 땅 팔레스타인에는 다르위쉬가 있었다. 그의 노래가 있다.

2. 인육의 음악, 투쟁의 침묵

    다르위쉬의 노래(시)들에서는 절망을 만나기가 힘들다. 오히려 팽팽한 긴장과 함께 비장미를 느끼게 된다. 그가 말하는, 노래하는 '나'의 존재는 '인식(자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집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은 희망가로서 읽힌다. 물질에 의거한 시들이 자주 범하는 비극성이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에는 없다. 우리가 흔히들 만나는 시집, 시는 낭만적이고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라는 생각에 근거한 시집에서 만나는 절망이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 이름에는 다른 글자들을 선택할 수 있다 (부엉이의 밤, 113쪽)
우리는 말로 이루어진 나라를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떠난다, 111쪽)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시편들은 크게 유랑(현실)과 회귀(바람, 열망)를 보이고 있다. 찾아 떠남과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성이 중요한 축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으로 우선 읽힐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내가 가진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식의 전부이기 때문다. 잃어버린 땅이 아닌 그들은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서 반세기 동안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1948년 고서에서 '허락된 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비집고 들어온 유대족들이 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에 가한 폭력을 우리는 교과서가 아닌 책에서, 뉴스에서 얻어 읽게 되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과서가 아닌 책들에서는 팔레스타인이 겪는 고통이 부당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때(20년 동안) 나는 유대족의 편에 서 있었다. 단지 색바란 고서(성경)에 그들의 땅이라는 명시, 글자 편 조각 때문에 유대족 편을 들어왔다는 것이 낯부끄럽다. 그러나 종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이스레엘의 편에 서서 팔레스타인을 힐난한다. 무엇인 옳은지, 역사가 가르쳐 줄까. 회의가 든다.

  다르위쉬는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서 떠돎(유랑)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유랑은 나의 개인적이요 감상적인 여행과는 차원이 다르다. 유랑은 곧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열망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편일 수도 있다. 물론 방관자, 제삼자의 눈에 그것은 아름다워 보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현실도 치열하지 않은 것이 없다. 유랑 속,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모든 노래는 잇새 바람 소리처럼 분노의 노래, 인육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내 등의 괴나리봇짐이 나의 마을이죠.(아테네 공항, 112쪽)

3. 민족과 말(입말, 글말)

   말이란 한 민족을 대표하는 것이다. 말보다 더 앞서고 중요한 것은 '민족적 자각'이 아닐까, 이 시집을 읽으면서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언어가 곧 민족이라 여겼다. 처음 '언어'가 없으면 민족도 소멸하고 만다는 명제를 순순히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국어 없이도 민족이 남아 있는 경우를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글, 말, 생각은 한 우물에서 자아올린 것이지만, 지금 내 생각에 생각이 우선 순위로 두는 것이 옳지 않나 싶다. 말에서 글이 파생되고, 말은 생각에서 파생되는 것... 그래서  자민족에 대한 자각이 그 무엇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이 시집에서 다시금 느꼈다. 다르위쉬는 자국어 사전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아침 머리맡에서부터 그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르위쉬의 시편들에서는 언어, 글자, 사전이라는 어휘를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한 이유가 유대족의 몰염치한 강제점령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의 이름은 '다른 글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실제 땅은 빼앗겼지만 아직 '말'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나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다르위쉬의 시편들에서 다시금 고유 언어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치열한 자각이 필요하다.

  다르위쉬는 말 위에 나라를 기억하며 떠돌고 있다. 그를 쫓아 총구를 들이대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어렵잖게 짐작이 가능하다. 절박한 유랑길에서 다르위쉬는 바위에 서 있다. 그는 바위 위에 있듯 바위 밑에 있든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르위쉬의 시편들에서는 회의가 없다. 절망이 없다. 잠시 다리쉼만 있을 뿐이고, 떠나야 했던 자의 고뇌가 있을 뿐, 그러나 그가 바라보는 곳은 한곳이기 때문에 혼란스럽지 않다.


                            돌아올 이들을 기다리며


내 사랑하는 이들의 오두막이 모래 한복판에 있다
나는 비와 함께 깨어 있다...
나는 북쪽에서 올 파발꾼을 기다리던 율리시스의 아들
뱃사람이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배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그는 산꼭대기를 향했다
- 혁명가를 지키기 위해 아버님이 그 위에서 기도하시던
바위여

나는 진주를 주어도 결코 너를 팔지 않겠다.

나는 결코 떠나지 않겠다...
              결코 떠나지 않겠다...
                           결코 떠나지 않겠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을 가르며 말들에게로
돌진한다
-어머니, 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저희가 돌아갑니다.
이제 그들이 상상하는 시대가 아니에요...
뱃사람의 뜻대로 바람은 불어오고...
                            배는 해류를 이깁니다!


어머니, 저희를 위해 무슨 음식을 해놓으셨나요? 저희가 돌아가는데.
기름통과 밀가루 포대를 그들이 약탈해 갔으니, 어머니,
들판의 채소나 주세요! 푸성귀라도 주세요!
             저희가 돌아갑니다!


내 사랑하는 이들의 걸음 걸음은 쇠주먹에 깔린 바위의 신음
나는 잠들지 못한 채 빗소리를 듣고 있다
나는 공연히 먼 데를 응시한다
나는 바위 위에... 바위 밑에 굳건히 남아 있으리라  

    다르위쉬는 '바위'에 서 있다. 내일을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시편 곳곳에는 죽음이 등장한다. 그 죽음은 '나'의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위한 밑거름이다. 또 다른 나, 그것은 후세이다.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서, 고독하고 답답한 시간을 걸어갈 사람들이 곧 '나'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주검을 '정원'에 묻어달라고 한다. 태어나 자라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밑거름이 될 것이라 여기지 않다가, 삶의 변방으로 밀려날 시기에 차츰 인정한다. 나는 이 시대에 무엇인가, 고민한다. 다르위쉬는 다음을 위해서 준비된 존재로 자신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의 바람이 쉽사리 성사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4. 다름과 같음

   다르위쉬 시집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에는 다양한 시각의 시편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가운데 '어머니', 즉 남겨진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소설 <토지> 평사리 마을에 남겨진 늙은 그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왜 박경리 선생이 4, 5부에서 소설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면서까지 그들을 묘사하는 데에 정열을 쏟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남겨진 그들, 빼앗긴 땅을 지키고 있는 그들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다르위쉬 시집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과거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다.

   팔레스타인과 우리의 거리, 그리고 여전히 지구상에 빈번히 만들어지는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사람은 <생각의 오류>를 지닌 기이한 동물이기 때문에 과거를 잔악상을 추억하는 괴이한 행동을 한다. 독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식민지를 동경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 시대에 아무 기득권층이 아니다. 기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현 시대를 적응하지 못하는 또 다른 소외계층이다. 한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그러한 시대를 감상적으로 추억하지도 회상하지도 않는다, 다만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환(key18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