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의 즐거움
이한우
휴먼앤북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아부의 즐거움』이라니 '아부예찬'인걸까? 책이 과연 받아들이기 쉬운 내용일지 어떨지 몰라서 책에 손을 얹었다 떼길 여러번 한 후에야 책을 펼칠 수 있었다. 책의 저자에 대해 훑어보니 대번에 움찔한다. 이한우씨는 철학으로 석, 박사과정을 마친 사람이다. 괜히 심상치 않단 생각이 들지만 집어들었으니 이젠 피할 수 없다.
저자의 말 마따나 이 책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아부의 즐거움』이란 제목만으로 생각하면 책의 내용은 꼭 '아부를 즐겨하자'는 내용일 것만 같다. 읽어보지도 않고 속단하다니, 그토록 어리석을 수 없다. 이 책은 사실 『아부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이 안 어울리는 책이다. 오히려 '아부와 아첨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 명명함이 올바를 듯 하다.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이 책에서 아부와 아첨을 언어학적 관점에서 철저히 분석한 후에 이를 역사와 사회적으로 비추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철학적인 고찰을 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읽었다간 이해도 못하고 큰코다칠 일이다. 정신바짝 차리지 않으면 저자의 '이중부정' 조차도 쫓아가기 쉽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아부와 아첨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 생각하고 읽었다. 저자가 말하는데로 살펴보면 아부(阿附)와 아첨(阿諂)은 분명히 다르다. 이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아예 이 책을 이해할 수 조차 없다. 저자가 말하는 아부와 아첨은 이렇다. 아부는 한자어로 언덕 아(阿)와 붙을 부(附)가 결합된 것으로 '언덕에 붙다(혹은 기대다)'는 뜻이다. 이는 곧 '주군에게 기대다' 즉, '주군에게 몸을 의탁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전까지 우리가 알던 '강자에게 붙어 알랑거리다'와는 확연히 다른 뜻이 된다. 이와 같은 알랑거리다는 뜻은 바로 아첨이다. 아첨은 아첨할 첨(諂)을 사용해 알랑거리다는 뜻을 나타낸다. 한자어를 살펴보면 이 두 단어가 현재의 용례상은 같은 뜻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는 기본적인 상식이다.
저자는 아부와 아첨을 정의하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 군자와 소인에 대해서 운운한다. 사람들은 군자는 선하고 소인은 악하다고 여기며, 직언(바른말)은 선하고 아부(혹은 아첨)은 악하다고 여긴다. 저자는 이를 일일히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지만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틀렸다는 것이다. 이제 '아부와 아첨에 대한 고찰'은 도덕주의를 이야기 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가 없다. 저자는 도덕주의를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지만 정작 이야기에서 필요한 것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부정적인 도덕주의 이다. 이는 즉 '나는 선하고, 저는 악하다'는 식의 도덕주의를 말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단 한 마디로 일축하는데 이를 옮기면 이렇다.
진정한 의미의 도덕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실은 도덕주의에 물들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자기만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는 어떻게 보아도 도덕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생략)
이 도덕주의가 발전하면 '나는 아부하거나 아첨하지 않으니 선하고, 저는 아부하고 아첨하니 악하다' 라는 논리가 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부는 자신이 믿는 리더에게 기대는 것이고, 그 리더에게 직언을 하기 위해서는 십수번 리더의 비위를 맞춰야(아첨) 한다. 조금 더 설명을 해 본다면 '나'는 리더에게 기대지 않고 그에게 신뢰를 사지 못했고, '저'는 리더에게 기대 그의 신뢰를 샀다는 것이 된다. 어찌보면 '나는 선하고, 저는 악하다'는 것은 실은 리더의 신뢰를 사지 못하고 그의 마음을 사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변명일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책의 다른 설명들을 떠나 이에 대해 생각을 해 보자. 내 어머니는 종종 내게 "바른말이 앙살이라고.." 라 말씀하신다. 내가 종종 부모님의 잘못한 부분을 찝어서 이야기 할때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이 무슨말인지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선과 악의 이분법적 원리로 머릿속에 주입해온 도덕주의 적인 해석을 떠나서 실제하는 현실을 바라보면 리더들은 결단코 아첨(듣기좋은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리더라 해서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꼭 리더에게 하는 말이 아니어도 주위 사람들 사이에 아첨(듣기 좋은 말)은 분위기를 화기 애애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경우 아무도 아첨한다고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첨은 언제 문제가 되는가? 아첨을 듣는 리더나, 아첨을 하는 부하 사이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리더의 눈에 들지 못한 부하'의 눈에 곡해 보이는 것이다. 리더의 눈에 띄지 못한 부하는 '저는 악하고, 나는 선한데 리더가 이를 모른다'고 곡해하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그의 문제지, 아부를 받거나 하는 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직언을 하기위해서는 그에게 전적으로 아부(기대어)해 신뢰를 얻어야 한다. 신뢰를 얻기 위하여서는 약한 정도의 아첨이 필요하다. 약한 아첨이란 듣기 좋은 말 수준의 아첨을 넘어서 리더의 눈을 가리는 아첨이다. 이러한 아첨은 당연히 질탄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리더의 기분을 어느정도 맞추어 신뢰를 쌓을 것이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부하직원이 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리더의 의견을 잘 맞춰주고 존중하는데 반해 다른 하나는 직언을 한답시고 사사껀껀 방해를 하면 누구를 이뻐하겠느냐. 사람들은 종종 아부를 하면 간신이고, 직언을 하면 충신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간신이든 충신이든 다 같은 리더에게 몸의 의탁했다는 점에서 둘다 아부를 하고 있다. 즉 이때에 중요한 것은 리더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누가 보여주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위의 경우에선 당연히 전자의 사람이 리더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부와 아첨의 문제를 설명한다. 저자는 아부와 아첨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또한, 이를 부정적으로도 바라보지 않는다. 이 책은 철저히 중립적인 입장에서 편견을 깨는데 주력하고 있다. 다만, 지금까지 워낙 도덕주의적인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 아부와 아첨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에 뼈저린 일침을 가하고 있을 뿐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아부의 상황에 놓여있다. 국가에 아부를 하고, 상사에게 아부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직업의 세계에서 이러한 아부가 싫어서 독립했다 손 치더라도 그들은 그 사업을 위해 도다른 누군가에게 아부를 해야 할 것이다. 즉 성공하기 위해서는 리더들이 가득한 세계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어찌해야하는가? 계속해서 아부는 나쁜것이라고 손서래를 칠 것인가? 설령 그런다 하더라도 인간세상에서 아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아부와 아첨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 한권의 책으로 상세히 파헤쳐 보여준다. 이 책을 읽다보면 아부와 아첨이 살아가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씌여졌다. 많은 부분이 과거의 편견을 깨는데 주력하고 있지만,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리더의 눈을 가리는' 아첨의 일례들을 들어주며 아첨을 위한 아첨이 가져오는 폐해에 대해 설명한다. 혹, 이 책을 읽고 아부와 아첨에 대해 너무 포용적이 될 것을 염려한 때문일까?
다 읽고나니 이 책의 주제는 '아부와 아첨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 할 수있겠다. 곧잘하던 '저 사람은 너무 아부(아첨)이 심해'라는 말도 이제는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사회를 바라 볼 수 있게 되나보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깜찍라엘(rael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