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럽
유럽연합이란 말은 학창 시절 사회 교과서에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단어일 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단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읽었던 경제책에서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력이 되었고,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통화 중에도 미국 달러와 함께 유로화가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은 아니여도 미국의 폭주를 막아줄 하나의 세력이 생겼다는 반가운 소식임을 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유럽연합은 총 27개국으로 이뤄진 인구 5억이나 되는 거대한 세력인데다가 유럽연합의 총생산은 명목가치로만 따졌을 때만도 세계 경제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미국발 경제 위기를 시작으로 평가절하된 달러 대신 유로화가 더 많이 국제통화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이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화폐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유로권은 2009년 현재 회원국 16개국(1999년 출범 이후 그리스가 2000년부터, 슬로베니아가 2007년부터, 그리고 키프로스와 몰타가 2008년, 슬로바키아가 2009년부터 동참!) 인구 3억 2천여 만 명에 국내총생산 규모가 미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렇기에 21세기에서는 국제 정치 경제 질서를 살펴보는데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처음에 유럽연합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는 그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유럽이란 지역에 따라 끼리끼리 묶었구나 하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관계만큼이나 껄끄러운 영국과 프랑스가 생각났다. 그 복잡다단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어떻게 단일한 하나의 초국가의 형태로 묶일 수 있었을까. 아니,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신기했다. 오랫동안 서로 적대국이었던 나라들도 있었을 테고, 경제적으로 경쟁 관계에 놓인 나라들도 있었을 텐데, 그냥 단순히 생각해봐도 역사도, 언어도, 문화도, 화폐도, 심지어 정치구조도 다른데 어떻게 하나로 묶을 생각을 했을까 싶은 것이 내 머리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오류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유럽연합의 계기가 된 것이 바로 하나의 전쟁이 전세계를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는 자각을 하게 해준 제1, 2차 세계대전이었단다. 하나의 대륙에 맞붙어있기에 다른 나라에 생긴 전쟁이 자국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아주 간절한 우려가 공동체를 만들게 된 계기란다. 말 그대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절박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많은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조금씩 양보를 하고 배려를 해서 하나의 통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초국가적인 기구를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저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했던 독일을 견제하려는 욕구가 강했던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서, 프랑스와 다른 유럽국가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더 나아가 국가경쟁력과 대외적 위상을 높여서 나중에 동독과 통일을 이루려는 독일의 속셈을 위해서 시작했던 일이었다. 그것이 이제는 전유럽을 통합하며 전유럽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처음에 유럽 통합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1950년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로베르 슈만이 유럽의 석탄 · 철강의 생산 및 판매를 공동관리할 것을 제안하면서부터이다. 슈만 플랜으로 불리는 이 제안은 평화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당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인 석탄과 더불어 철강의 사용을 관리하면서 독일이 몰래 전쟁 준비를 할 것을 미리 막자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제안은 당시 서독으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던 것이 동독이 소련의 지배 아래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소련의 침공이 우려되었기에, 서유럽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슈만 플랜은 프랑스와 서독을 비롯하여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의 베네룩스 3국, 그리고 이탈리아까지 모두 6개국이 참가하여 유럽석탄철강공동체로 구체화될 수 있었고, 그후 유럽연합까지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구가 갖는 의의는 최초로 초국가적 기구의 성격을 가진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지금 당장은 초국가적인 기구에 거부감이 들더라도 차차 유럽인들의 인식이 변해서 똘똘 뭉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유럽이 오랜 시간을 들여 연합해가는 과정을 보니까 경제 성장이 탄탄한 독일이 서유럽 속에 편입되기 위해 무한정 참아주고, 자본도 가장 많이 기부하는 등의 여러 희생들을 감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나라만 해도 여러 조약을 통해 새로운 유럽법을 만들 때마다 꼬투리를 잡거나 자국민족주의가 투철한 민족성 덕분에 유럽 통합으로 가는 방향에 걸림돌이 되었는데, 이제껏 독일은 한 번도 그런 제동을 걸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사소한 기구라도 하나 만드려고 해도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우면 금방 와해가 되는 것이 당연하니 이럴 땐 능력 있는 어느 한 사람이 조금 더 참아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만약 아시아통화기금을 만든다고 하면 아시아에서 경제 성장이 제일 뛰어난 일본이 독일처럼 조금 더 희생을 해주는 방향으로 설립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경제 성장률은 별로이지만 일본에게 이상한 자존심을 내세우기에 그것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일본이 조금 더 희생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에 봤던 책에서 미국 달러 헤게모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시아만의 통화기금이 있어야 함을 이미 알고 있었던 일본이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 자국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유리하게 끌고 나가야 할 우리나라 관리들이 그것을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말아먹었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통탄할 일이다. 아시아통화기금을 만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아시아의 이익이 될 테니까 남 좋은 일 해준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이제까지의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 아시아도 똘똘 뭉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지.
어쨌거나 유럽연합의 결성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우리 입장에서 미국 세력을 견제하기에도, 유럽 입장에서 유럽의 과거 찬란했던 위상을 되찾는데도 다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 오랜 시간 이러한 과업을 해내기 위해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을까 생각하니, 정말 존경스럽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지지부진 성과가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다니~! 이처럼 고귀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국제무대에서 자국의 이익에 합당한 방향으로 상황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약간의 이익은 포기하더라도 유럽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던 유럽인들의 모습을 보노라니 우리 아시아인들의 인식도 하루빨리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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