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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흐보다 소중한 우리미술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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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 작품을 보면 늘 당황하곤 했다.  아마 작품이 전시장 벽에 걸려 있는 게 아니라 어디 바닥에라도 놓여있었다면 상하좌우를 구분하기 어려운 작품들도 허다했다.  오랜 시간과 미술 비평가들이 훌륭하다고 검증해준 유명한 화가와 작품이 아니라면 -박수근이나 이중섭 같은- 현대화가의 이름은 낯설고 그들의 작품은 더욱 난해하기만 했다.

유명한 서양화가들의 전시회를 비싼 입장료를 지불해가며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감상인지 눈도장인지 모르게 둘러보고 나오면, 어쩐지 ‘이게 아닌데..’하는 느낌, 아무리 유명하고 휼륭하다 해도 내 정서와는 맞지 않는 듯한 느낌에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정쩡해지곤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옛 미술작품들은 어떨까 싶어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옛 그림들 역시 나 같은 문외한은 누군가의 친절한 설명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의 문맹과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옛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져 뿌듯해지긴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긴 어려웠다.

따라서 누군가 지금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우리 화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가르쳐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현대 미술의 난해함과 서양화가들의 유명작품과 우리 정서와의 불일치, 우리 옛 그림과 나 사이에 가로 놓인 시간의 두께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현역 미술가 33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이 내 관심을 끌어당긴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저자가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아서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대표 화가 33인과 그 작품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무척 시원시원했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듯한 붓 자국이 난무하는 작품 속에서 ‘역동적인 회화미’라든가 ‘작가의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라든가 ‘설화적이고 신화적인 정조’ 또는 ‘해방감과 자유의 감정’을 느끼고 발견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이 책의 가치가 더욱 부각되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한 작가를 지켜보는 일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책은 아무데나 펼쳐도 33인의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한두 개쯤은 볼 수 있을 정도로 작품의 사진 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추구해온 미술세계의 커다란 흐름이랄까 분위기랄까 하는 것들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어쩌다 한 번 전시회를 구경(?)갔다 와서는 작품을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희망사항일 뿐이며 작가의 예술적 열망과 창작의 노고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작가의 작품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올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오래도록 소중하게 그림을 바라보는 일, 어쩌다 한 번씩이 아니라 애정을 갖고 전시회를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발품과 마음씀을 잊지 않는 일이 현대미술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가 4년여의 시간과 혼탁한 미술계에서 보석을 건져내 그 가치를 재조명하는 공을 들여 세상에 내놓은 책이니만큼 그 의의도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두식 화가에 대한 글에서 마지막 글 마무리가 이상하게 끊겨 있었다. 아무래도 출판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은데 2쇄에서는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또 하나는 저자의 글에서 설명하고 있는 작품이 책에 실려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왕에 작품을 실을 거라면 저자가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작품을 실어주는 편이 독자 입장에서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의 작품 설명을 읽고 그 작품 사진을 찾는데 없을 경우 무척 실망스러웠다.  또 하나는 작품 사진에 적어도 작가와 작품명, 작품크기, 재료, 작품제작연도 정도는 빠짐없이 표기해주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이두식 화백의 작품은 모두 11개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사진 밑에 모두 ‘이두식’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작품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2005년에 그린 그의 작품을 보자’(p.178)는 저자의 글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또 임영길 화백에 대한 글에서는 그의 <철학적인 불>이라는 작품에 대한 설명이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그 작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밖에 원문자 화백의 작품은 작품 3개에만 그나마 2004년이라는 작품연도가 적혀 있엇고 나머지 작품에는 <사유공간>이라는 제목 하나만 있을 뿐이다.  심재현 조각가의 작품도 <그늘 날개>를 제외하고는 작품명, 크기, 제작연도가 모두 전무했다.  서승원 화백의 작품들도 <동시성>이라는 제목만 있었고, 작품명이 아예 없는 작품도 하나 있었다. 저자의 노고에 비해 출판의 세심함이 충분히 미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33인의 작가 중 홍익대 출신이거나 홍익대와 관련이 있는 작가가 23명이었고 서울대 출신 화가가 4명, 그 외가 6명이었다.  홍익대 미대의 명성이야 모르고 있는 바가 아니지만 저자의 모교가 홍익대라서 그런지 유난히 홍익대 출신 화가들에 대한 글이 많은 것이 어쩐지 불편했다.  저자가 주창한 것으로 보이는 ‘범생명적 초월주의’에 참여한 듯한 몇몇 작가들에 대한 글들을 읽을 때에도 좀 생뚱맞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느낌이며 이 느낌이 내 치졸하고 못난 의심증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아직 소개하지 않은 훌륭한 작가분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그 분들은 다음에 집필할 책에 반드시 소개할 생각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다음에 나올 책에는 저자의 깊은 심미안과 탁월한 문력(文力)이 더욱 강한 힘을 보이기를 기대해 본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검은별(roberta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