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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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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열림원

가까운 곳에 작가 이청준님과 동일한 이름을 쓰시는 신부님이 계셔서 간혹 헷갈리는 분, 영화 서편제와 천년의 학의 원작자로 유명한 분, 그 분의 소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2008년 1월 초에  읽을 기회를 얻었다.  주위를 둘러 볼 줄 모르는 성격이 독서에까지 미쳐 다양한 분야, 많은 작가를 만나지 못하고 내가 만들어 놓은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나는 이청준님의 소설을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사춘기 때 고민했을 법한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에 대해 아직 계속 생각 중이며 지금도 나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그에 대해 섣부른 평가를 내리지도 않을 뿐더러 그 평가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하물며 이청준님에 대해서는 귀동냥한 지식 뿐 그 분의 글을 직접 접하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책을 만나기 전 미리 어떠한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큰 기대감에 많이 설레었지만 반대로 그 분의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지레짐작하여 겁을 먹기도 하였다.  나는 이렇게 이청준님의 소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맞이하였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에는 총 7편의 단편소설과 총 4편의 에세이 소설이 담겨 있다.  이 소설에는 가슴에 사연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사연은 시대와 운명 탓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것은 내 피부로 직접 느껴보지는 않았지만 숨을 쉬기 시작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서 익숙해져버린 감정이다.  고국과 고향, 그리고 어머니로 대신할 수 있는 그것, 그것은 바로 '정한'이다.

여러 단편들 중 책 제목이 된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에서는 지금의 우즈베크 공화국 수도 타쉬켄트 시에서 정착하기 위해, 즉 살아남기 위해 고국과 고향, 고려인 그리고 이름까지 모두 잊어야 했던 유일승 씨가 주인공이다.  유일승 씨는 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고국을 방문하여 혈육을 찾을 결심을 하며 드디어 2002 월드컵 때 고국 땅을 밟는다.  그러나 일승 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치 않다.  함께 온 일행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동생 재승 씨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끝내 홀로 고국을 떠난다. 

자네, 내가 어렸을 적 고국을 떠난 뒤로 그 조국을 두 번씩이나 잊어야 했다고 한 말 기억하는가.  처음 한 번은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조국과 조국의 전쟁을 용서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런데 이제 나는 다시 세 번째로 조국을 잊어야 했고, 잊어가고 있는 참일세.  이번엔 여기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종생까지 살아가야 하는 내 삶을 용서하기 위해서 말이네.  (p78-79)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는 역사와 이념의 피해자인 주인공의 한을 담고 있다.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주인공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없다.  이제 그만 내려놓을 때도 되지 않았냐고, 이제는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냐고, 주인공에게 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상처는 아파도 아프다고 소리칠 수도 없이 마지막까지 짊어지고 갈 자신의 짐이다.  너무도 쉽게, 아니 죽을힘을 다해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낸 것에 대해 참고 또 참아 스스로 용서하는 길 뿐. 

어떠한 원인으로 피해자가 되었든 상처 입은 자의 마음은 모두 같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잊어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다시 또 떠오르는, 그래서 더 고통스러운.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고 말한다.  이 한 문장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

설렘 반 걱정 반으로 펼친 이 소설은 처음에는 읽어 내려가기가 힘들었다.  이청준님의 문체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우리 정서인 '한'으로 통해서 일까.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떨림, 먹먹함을 느끼고 싶은 분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쁜처키(blueru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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