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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의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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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투쟁
함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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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는 책들은 정말 스스로의 아둔함을 깨우쳐주기에 너무 좋다. 표지부터가 화려한 왕의 투쟁은 첫 장을 넘기면서 부터 '왕(王)'의 포스를 느낄 수가 있었다. 한장 한장 핏방울 무늬와 문헌의 인용구가 금빛 잉크로 씌여져 진정 왕을 다룬 책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두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는데 첫째는 일 전에 읽었던 『아부의 즐거움』의 내용을 직접 역사속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조국의 역사에 대해 너무도 부족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언코 이 책의 내용은 분명 단 하나도 아깝지 않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책의 한 구절이 버릴 곳이 없다. 역사에 대한 상식을 폭넓게 배울 수 있는 좋은 책이라 확신한다.

'왕'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을 떠올릴까? '나라의 1인자', '권력의 최고봉' 등 무언가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행사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최소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일전에 읽었던 로마 제국정의 초창기를 다룬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나, 이슬람의 왕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아라비안 나이트』등의 책 속의 왕은 '절대군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 속에서 왕은 '절대권력가'였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드니 무언가 이상하다. 『왕의 투쟁』이라하면 왕이 무언가에 '맞서 싸운다'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데 '절대권력가'인 왕이 맞서 싸울만한 것이 있을까?

책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 이름만 대면 다들 알듯한 4명의 왕을 재조명한다. 바로 세종, 연산군, 광해군, 정조다. 이들은 희대의 명군으로 꼽히거나, 희대의 폭군으로 꼽히는 이들이다. 이는 누구라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드릴 정도로 우리의 역사 인식 속에 팽배해 있다. 그러나 진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이 누구였는가? 왕이었는가? 신하였는가? 이를 간과하고 역사를 바라보면 우리는 큰 것을 놓칠지도 모르겠다.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은 왕이 아니고 신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생전에 볼 수 없었다. 즉 신하들이 기록하는 대로 왕은 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를 어기고 왕조실록을 읽은 '연산군'은 결국 신하들의 신뢰를 잃고 내어 쫓겨 왕의 칭호도 받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신하들의 힘이 얼마나 강성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이렇게 신하들에 의해서 기록된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대신 왕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바라보고 이를 역사적인 맥락에 맞추어 그 시대상황과 개개인으로서의 왕의 모습을 분석한다. 이 책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왕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종이라하면 우리는 '성군(聖君)'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속속들이 살펴보면 비단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라 철저히 '명나라에 사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지금의 남존여비 사상의 첫 발단도 바로 세종대왕이 만든 것이다.(일전까지는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를 드는 형태를 띄였으나, 세종이 유교적 사상의 모범을 위하여 자기의 공주를 유교적 예법에 따라 남자의 집에 시집을 보냈다. 그 후 왕의 뒤를 따라 다들 이를 받들어 시행하였다.) 현대에 와서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와 '과학기술의 발달'등으로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당시의 세종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실제로 훈민정음은 당시 백성들에게까지 알려지지 않았고 정조 이후에 가서야 그 쓰임이 많아졌다. 당대의 세종은 오히려 '조선의 기틀을 세웠다'는 점과 '성리학적 명분에 걸맞게' 살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았다. 세종은 특별한 여가를 즐기지 않았으며 책읽기를 즐겨하였고, 신하들과의 경연에 자주 참여했고, 서적도 많이 간행하였다. 조선은 '문신'들이 세운 나라이고, 성리학이란 본디 '책'을 중시하는 학문이다 보니 세종의 이런 모습은 신하들에게 위대하게 보여졌을 법 하다. 여기에 세종은 신하들에게 많은 권리를 위임해 주어 자발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여 신하들에게 신임을 샀다. 결과적으로 세종은 신하들에게 성군으로 추앙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바로 연산군이다. 역사는 연산군이 생모의 죽음을 알게 되자 폭군으로 변하였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연산군은 왕이 된 후 1년여 후에 생모의 죽음을 알지만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하는 것은 무오사화(김일손이 쓴 '조의제문'의 문제로 왕조실록 편찬이 늦어지자 이를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고자질 한다. 이 조의제문 등이 역적으로 몰리게 되어 관련 인물들이 모두 처벌을 받는다.)때부터다. 이 전까지 연산군은 언론기관(사헌부와 사간헌)에 의해 모든 일에 제지를 당했다. 연산군은 왕이 '절대권력자'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세종이 만들어 놓은 규칙들로 인해 신하들의 제제를 받지 않고는 불가피 했다. 그렇다 보니 연산군은 왕이면서도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울분이 쌓여있었는데 이 때 마침 무오사화가 터진 것이다. 이 무오사화를 기점으로 연산군은 '신하들은 벌을 주면 조용히 있는다'는 조금은 잘못된 것을 깨닫는다.  이 후부터 연산군은 변하기 시작해 마지막에는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지만 이 것이 신하들의 반발을 사 결국 폐위된다. 다시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왕이 '절대권력'을 갖기 못하고 '신하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왕이라 할 수 있을까? 연산군의 주장은 사실 올바른 것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연산군이 저지른 폭군으로서의 행태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다른 나라의 절대권력자(왕)들이 한 일에 비하면 그리 큰 잘못은 아니다. 로마사에 나오는 칼리굴라나 네로 중국사에 나오는 여러 왕들을 생각하면 사실 연산군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가 조선의 왕이었기에 '역사속의 폭군'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모두의 기대를 등에 엎고 왕이 된다. 그러나 친명배금정책에 대해 신하들과 의견을 달리하다 결국 폐위된다. 명나라가 거의 망해갈 즈음 금나라는 자신들을 상국으로 대하라고 한다. 이 때 신하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사로잡혀 현실을 바로 직시하지 않고 '절대로 명나라를 반(反)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광해군은 당장 나라의 존망을 생각해 '명을 버리고 금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보니 신하들 눈에 광해군은 제정신이 아닌 왕이었다. 나라의 근본에 어긋나는 짓을 하려는 왕이라고 생각해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역사 속 광해군은 제대로 조명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신하들의 반대에 이루려는 뜻을 이루지도 못한다. 마음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전에는 알지 못하던 사실인데 정조는 '천재'라고 한다. 세종이 '노력'을 통해서 성군이 되었다면 정조는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왕이되던 20대부터 이미 모든 것을 알아 신하들을 가르쳤다고 한다.(경연은 원래 임금이 배우는 자리인데 정조는 경연에서 신하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그의 왕권은 나름대로 탄탄했다. 그러나 정조는 매우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신하들의 인사를 '회전문식'으로 행했다는 것이다. 인사가 아침 저녁으로 달리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그의 인사정책이 무척 빠르겨 변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이를 통해서 신하들이 자신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했다. 인사가 워낙 자주 행해지니 신하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세력을 키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정조는 탕평정치로도 유명한다.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실각하고 만다.

조선에서는 '임금이 마땅히 행해야할 4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 성학에 힘쓰며 수신에 전념할 것. 둘째, 개인적인 오락과 취미를 멀리하며, 사치에 빠지지 말 것. 셋째,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 넷째, 언로를 열고 신하들의 간언을 용납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얼마나 사람을 옥죄는 것인가. 즉, 언제나 학업에 힘쓰고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하니 왕은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조선의 왕은 그저 '명나라 왕 대신 조선을 통치하는 왕'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 이러나 저러나 왕의 입지는 약했다. 왜 이러했는지는 조선이 건립된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은 '이성계'가 문신들과 짜고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다. 통치를 시작할 때 부터 '문신'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고, 그들의 이념은 '성리학'과 '유교'였다. 따라서 성리학적 이념에 걸맞게 명나라에게 충성하고, 학문을 열심히 해야했다. 신하들의 의견도 수렴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조선의 왕들은 태생적으로 신권과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신하들이 평가한 그대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단 한 부분의 내용도 놓칠 수가 없을 만큼, 책은 중요하면서도 많은 내용을 일관성있게 담고 있었다. 이 책은 4명의 왕들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면서도 함께 이 시대의 핫이슈인 '리더쉽'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책에 나오는 왕들은 세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리더쉽'에 실패한 왕들이다. 신하들은 왕을 신뢰하지 않고, 그에게 아부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왕들의 통치가 힘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은 역사를 설명하면서 '리더쉽'과 '팔로우십'에 관해 이해하기 쉬운 예들을 함께 풀어놓는다. 얻을 것이 많은 책이다. 정리를 하다보니, 이 책의 내용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낀다. 알찬책을 읽어서 기쁘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깜찍라엘(rael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