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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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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우리와는 지구 정반대편에 위치했다는 아득한 거리감 외에도 생활방식이나 삶에 대한 태도가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곳이라는 막연함이 전부였던 것 같다.  태양의 제국 잉카,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 이구아수, 불꽃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했던 혁명가 체 게바라와 칠레의 슬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기타 줄을 튕기던 손이 으깨지면서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저항의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는 빅토르 하라, 울창한 아마존 밀림, 격정의 탱고,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찬찬, 펠레와 호나우드를 키워낸 축구열정, 화려한 리우 카니발, 만년설의 안데스, 제국의 발톱에 처참히 희생된 대륙, 빈곤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곳, 억압에 대한 저항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거센 땅, 해방신학의 모태가 된 슬픈 땅.....  가만히 따져보니 단편적이고 막연한 것들 밖에 없다.

이 책에 끌리며 눈독을 들였던 것도 나의 무지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 혹시라도 라틴과의 아득하고 막연한 거리감을 조금이라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었다.

‘화첩기행’이라는 책제목답게 화가의 그림이 많이 실려 있고, 신춘문예 당선 경력이 있는 작가답게 글이 수려하다.  화가의 손끝에서 살아난 그림들은 라틴의 느낌을 정겹게 전해온다.  글 끝에 TIP처럼 붙은 짤막한 설명글에 간혹 우표만한 크기의 사진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전적으로 글과 그림에 의존해야 하는 여행 이야기이고 사진 한 장 없이도 라틴의 느낌이 가슴으로 전해져오는 책이다.

쿠바,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6개국의 여행기는 단순히 어떤 장소나 유적에 대한 기록이기보다 각 나라의 예술, 문학, 자연, 건축물, 춤,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펼쳐져 있고 각 나라의 문화와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작가의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무엇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여행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1785년에 문을 연 고서점이 시내 한복판에 버젓이 자리를 지키고 150년 역사의 카페 토르토니가 문학과 예술의 태동지로 살아 있는 문화의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  우리나라 어느 대학가에 200년이 넘은 고서점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거나 문인들이 자주 모이던 제비다방, 밀다원, 금강다방이나 음악감상실 돌체 같은 곳이 아직도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문화수준은 그 위상을 더 한층 높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부러움이 함께 일어났다.  갑자기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만족할만한 개발이익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숭례문에 불을 지른 70대 노인은 바로 우리 사회의 상징이며 우리의 숨기고 싶은 자화상이 아닐까.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을 지키고 키워낼 수 있는 토양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 들어있는 라틴국가 사람들의 삶보다 우리의 삶이 조금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삶이 더 찬란할지를 놓고 보면 자신이 없었다.

문화생활이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가진 자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게다가 그나마도 어디까지나 적극 가담자로서가 아니라 소극적인 관람자로서 향유되는 것이 대부분인지라 어디서나 밴드가 연주되는 쿠바나 길거리에서 탱고의 향연이 벌어지는 아르헨티나, 화가 베니토 킨케라 마르틴의 캔버스가 되어 화려한 색채의 작품으로 거듭난 라 보카의 골목과 낡은 집들,  거리의 악사 마리아치 밴드의 음악이 흐르는 멕시코의 이야기는 너무나 낯선 동시에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헤밍웨이, 체 게바라, 프리다 칼로, 보르헤스, 파블로 네루다, 로맹가리 같은 유명인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남미의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는 지금의 내 생활을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곳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 첫 느낌, 미소, 눈빛의 마주침이 돈이나 열쇠보다 우선이란다.’(p.45)는 작가의 글에서는  태양처럼 밝고 바다처럼 시원시원하게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그들의 낙천적인 기질이 느껴졌다.  ‘그래도 삶이란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  힘든 노동 끝에 아내가 구워준 토르티야와 테킬라를 마실 수 있다면 이 생도 견딜 만하지 않은가. 이파리를 가시로 바꾸며 저 선인장들이 뜨거운 태양을 견뎌내듯, 산다는 건 어차피 무언가를 견뎌내는 것이 아니던가....’(p.128)하는 글은 삶에 대한 체념이나 낙관 따위는 넘어선 민초들의 무엇에도 꺾이는 법 없이 지독하리만큼 강인하고 질긴 삶에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혹독하고 기구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과장이 필요치 않는 자연스러움으로 밥 먹고 잠자고 배변하듯 문화와 예술을 생활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표현할 줄 아는 그들의 낭만과 열정이 부러웠다. 

책을 덮고 나니 우리의 삶이 너무 기형적으로 느껴졌다.  원색의 화려함을 가진 그들에 비해 우리의 삶은 지루한 무채색에 가깝단 생각에 답답해져온다.  어둡고 공기 탁한 노래방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 쏟아지는 탁 트인 장소에서 큰 소리로 노래 한 곡 불러본다면 답답한 속이 뻥 뚫릴 것 같다. 남미의 태양을 훔쳐오고 싶어졌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검은별(roberta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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