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소설 나무는 밤나무가 주인공이다. 그의 우화는 재치와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톡톡 튀는 맛은 없지만 수묵채색화 같은 담담한 어조에 담아내는 삶의 지혜가 마음을 조용히 비집고 들어온다. 저자는 열세 살에 결혼해 그 해 밤 다섯 말을 산에 심고, 자두나무와 앵두나무 석류나무를 심어 울타리 삼고 밤나무와 평생 친구로 지낸 저자의 할어버지 이야기를 글로 엮었다.
저자의 할아버지가 평생 친구로 여겼다는 늙은 밤나무는 아마도 이젠 뿌리까지 썩어 베어졌을 테지만 나무를 통해 영원히 숨을 쉬게 되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겨울밤부터 다음해 나무가 겨울잠에 들기 전까지 할아버지 나무가 어린 손자 나무에게 자신이 보고 경험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제 수명이 다한 것을 느낀 할아버지 나무가 손자 나무가 혼자서 열매를 맺고 사계절을 이겨낼 수 있게 지혜를 나누어 주려는 것이다. 봄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잎을 피우고 여름에 꽃을 피우고 장마와 태풍을 이겨내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다음 해를 준비하는 방법을 모두 일러준다. 손자 나무는 때론 반항도 하고 좌절도 맛보고 일 년 동안 피고 지는 꽃과 풀과 나무들을 보며 한층 단단한 밤나무가 되어 간다.
할아버지 나무는 아직 철없는 작은 나무에게 알려줄 것이 많다. 과수나무는 왜 다른 나무보다 수명이 짧냐는 퉁명스런 작은 나무의 질문에 할아버지 나무는 이렇게 말한다. 한 번이라도 온 정성을 바쳐 열매를 맺어 본 과실나무들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과수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고 덧없이 살아가는 것보다 열심히 열매를 맺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며.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 아들 나무에 서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때 자신이 왔던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말이다.
작은 나무는 또 자기 발치에 겨우 붙어 있는 냉이꽃을 우습게 보았다가 보이는 모습만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따끔한 훈계를 듣기도 한다. 필요한 만큼의 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놀고 먹는 벌도 필요하다는, 그 어떤 것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것도 배운다. 자칫 식상할 수 있는 교훈적인 이야기지만 감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매화나무, 대추나무 등 나무의 생태를 빗대어서 나름 변화를 주었다.
나무에는 이렇게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인생이 있다. 나무의 입을 빌어 우리 삶의 지혜를 일러준다. 바로 바쁘게 경쟁하며 사느라 잊으려 했던 기본적인 가치들이다. 밤나무가 굶은 알밤을 맺으려면 꽃을 많이 피우기에 앞서 뿌리를 단단히 땅에 박아야 하는 것처럼,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가 중심을 단단히 잡으라고 한다. 우리 할어버지들이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에 담긴 깊이를 잊지 말라고 한다.
이순원, 문학에디션 뿔, 2007년,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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