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인권 기행
슬픈 대륙에 남겨진 빛바랜 혁명의 유산
미국과 캐나다의 아래쪽에 위치한 중남미 대륙은 서구 열강에 의한 침략과 식민지 경험이라는 우리가 겪었던 아픔과 비슷한 상흔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더욱이 군부독재의 횡포에 맞서 불같이 일어난 혁명의 물결은 7, 80년대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고, 근래에 이르러 좌파 정부가 들어선 점 역시 우리의 그것과 닮았다. 하지만 혁명이란 이름으로 그들이 쟁취한 자유와 민주주의는 혁명 세력의 부패와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으로 이렇다 할 진전을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과거와 다름없이 대다수 원주민들은 여전히 절대빈곤의 처지에 있으며 권력을 쥔 지배층만이 늘 그렇듯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사회를 바꿔보겠다던 혁명 세력의 외침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남고 만 것이다. <남미 인권 기행>의 저자 하영식 씨는 혁명 후 변화의 기로에 놓인 중남미 국가들의 현주소를 책에 담았다. 아직 확연히 눈에 띄는 변혁의 모습은 없지만 원주민 출신의 대통령이 나오는 등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는 오늘의 남미를 자세히 조명하고 있다.
<남미 인권 기행>의 여정은 볼리비아에서 시작한다. 지리적인 여건상으로는 남미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대륙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볼리비아다. 그렇기 때문일까? 체 게바라는 쿠바에서의 혁명을 완성한 후 이곳 볼리비아로 향한다. 하지만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투쟁'은 녹록지 않았고, 결국 여기서 목숨을 잃는다. 그가 이루고자 했던 꿈은 결국 좌절되었지만 그래도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피가 뿌려진 땅에서 고대하던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나왔으니 말이다. 모랄레스 정권은 많은 국민들의 희망을 안고 들어섰다. 그리고 준비한 야심찬 계획들을 발표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다. 하지만 기득권층과 미국의 압력 때문에 계획추진에 난항을 겪으며 위기를 겪고 있다. 가장 중요한 현안사업 중에 하나인 농지개혁이 원주민과 대지주 모두로부터 반감을 사며 지지율이 급속도로 낮아진 것이다. 과연 볼리비아 정부는 이 난관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양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볼리비아에 이어 언급되는 국가는 아르헨티나다. 항상 축구와 탱고가 먼저 생각나는 아르헨티나 역시 다른 남미국가들처럼 군부정권의 혹독한 탄압에 숱한 국민들이 희생당했다. 아직까지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공공연한 금기처럼 여겨질 정도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군부정권이 자행한 무분별한 구금과 처벌 때문에 엄청난 실종자가 생겼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의 생사여부조차 알 길이 막막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정보공개와 진상파악을 요구하며 많은 국민들이 시위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얻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국민들의 울분에 찬 목소리는 높아만 가는 데 오히려 아르헨티나 정부는 군부 지도자들의 처벌은 고사하고 사면시켰다.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정부란 말인가? 저자와 인터뷰했던 미겔 드 루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중요한 산교육이라면 정의가 살아있다는 점을 사회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아르헨티나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군부실세들의 정당한 처벌은 꼭 필요하리라고 본다.
세로로 길쭉한 모양을 한 나라 칠레는 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거의 유일한 국가다. 하지만 그 정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해 군부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는 아옌데 정부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정권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학살이 자행된 건 물론이다. 문제는 아옌데 정부시절 엄청난 인플레를 겪으며 국민의 원성을 샀다는 사실이다. 그 같은 상황에 이르기까지는 미국과 다국적 기업의 횡포가 있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이런 정치적 현안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반면 피노체트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해 소기의 성과를 올린다. 이 때문에 일부 국민들은 피노체트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의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말이다. 어쨌든 피노체트는 잔인하고 폭압적인 군부 독재자였음에도 제 명까지 살다가 죽는다. 그 어떤 단죄도 없이 말이다. 피노체트는 이제 없지만 여전히 칠레에는 그가 남긴 유산이 많다. 우선 법이 그렇다. 희대의 폭군에 의해 잘못 만들어진 법이 여전히 남아 칠레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하루빨리 잘못된 법을 고쳐 민주주의의 숨통을 틔워야 할 것이다.
북미와 남미의 길목에 위치한 니카라과는 '소모사 정권'이라는 족벌 정권에 온 국민이 몸살을 앓아야 했던 비운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무려 45년간 니카라과인들은 독재정치에 시달려야 했고, 희생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비운의 역사만큼이나 투철한 혁명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니카라과인들은 소모사 독재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을 조직하고, 게릴라로 활동하며 끊임없이 정권에 대항했다. 결국 혁명 세력은 소모사 정권을 와해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한 지금 니카라과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혁명을 이끈 주동세력이 권력의 단맛에 빠져 부패해 버린 것이다. 권력층의 부패로 정치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바나나 농업으로 근근이 연명해 나가는 농민들은 '네마곤'이라는 살충제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MBC의 W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조명된 적이 있는 니카라과 농민들의 심각한 실상은 니카라과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몹시 안타까웠다. 혁명으로 세운 나라를 유지하지도, 국민을 지켜주지도 못하는 정부, 과연 니카라과에도 평화의 그날은 찾아올 수 있을까?
여정의 종착역은 쿠바다. 미국의 금수조치에도 아랑곳없이 현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에서 라울 카스트로로 권력이 이양되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체제가 유지되고는 있지만 국민의 행복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쿠바 역시도 변화와 변혁의 바람이 필요한 곳이었다. 새로 권력을 잡은 라울 카스트로가 통화정책이나 배급제에서 변화를 준다고는 하지만 국민들의 삶에 조금 보탬이 되는 정도일 뿐 의미 있는 변화라고 할 수는 없다. 현 쿠바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젊은이들과 지식인층이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모국인 쿠바를 떠나려한다고 저자는 전한다. 자국을 '탈출'하고 싶어 하는 국민들, 과연 이 국민들을 달래고 회유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은 쿠바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중남미 5개국을 순회하며 혁명의 역사, 인권 투쟁의 역사를 살펴봤던 <남미 인권 기행>은 혁명은 결코 완료될 수도 완전할 수도 없음을 보여준 의미 있는 기행문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책은 제대로 된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있어서 '과거사의 청산' 없이는 결국 한 걸음의 진전도 없다는 진리를 되새겨주기도 했다. 서구 열강의 침입, 미국의 간섭과 군부독재 세력의 전횡으로 눈물 젖은 대륙이 될 수밖에 없었던 중남미 대륙이 혁명에 성공하고, 좌파정부를 수립하는 등 밝은 미래를 위한 발판을 만들었지만 생각지 못한 갈등과 부패의 벽에 부딪혀 좀처럼 도약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 이유가 복잡한 이해관계에 의한 의사결정의 어려움에 있다면 우선적으로 민중의 뜻을 먼저 헤아려보는 건 어떨까? 이 결정 의해 민중의 삶이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까를 앞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추상적이고 다분히 모범답안적인 생각이지만 어머니가 밥을 지으실 때 가족을 먼저 생각하듯이 우선적으로 고려할 대상과 그 대상을 위해 필요한 일을 먼저 생각한다면 적어도 국민의 뜻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진 않을 것이다. 혁명을 위해 기꺼이 목숨 받쳤던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혁명의 참뜻을 되새겨 억압받은 자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자에게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이 슬픈 대륙에도 울분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 흐르게 될 것이니 말이다.
[출처] [오늘의 책콩] 남미 인권 기행 - 하영식 (북카페 책과 콩나무) |작성자 메롱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