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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종이인형

종이인형

황경신 지음
2009.05.25
펑점
인상깊은 구절
-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처럼 사랑할 수가 있을까, 지금보다 더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어제보다 오늘 이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오직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157p, <흔적> 중)

- 두 사람 중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꿈꾸는 가장 특별한 사랑이, 예고 없이 그들을 찾아왔다가 경고 없이 그들을 떠났어. 이것이 이 이야기에서 우리의 진짜 삶과 가장 흡사한 부분이야. (225p, <스토리텔러>중)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저 그 사람의 책이라면 무조건 소장해야만 속이 시원해지는 그런 작가들이 있다.

내겐 황경신이 그렇다.

 

마치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모아 듣고 또 듣듯이

나는 황경신의 책을 모아모아 읽고 또 읽는다.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녀만의 섬세한 문체와 감수성이 나는 너무 좋으니까.

 

<종이인형>에는 이런 부제가 달려있다.

"황경신의 사랑동화"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 속 사랑은 책 표지처럼 대체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였다.

순도100%를 추구하는, 완벽을 꿈꾸는 그런 사랑.

그리고 그러지 못해 한없이 외롭고 슬픈 마음들.

 

책 속 열다섯 색깔의 사랑이야기를 읽다 보니 저자는 '사랑'을 '절대적이며 완벽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라임 라이더>를 읽던 중 더욱 또렷해졌다.

  "그건 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랑은 좀 더 무겁고 깊은 무엇이어야 한다. 사랑은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무겁고 깊은 무엇의 중심에 존재해야 한다. 사랑은 우리의 힘과 의지로 시작하거나 유지하거나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완벽하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한 우리가 그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랑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나에게 사랑해, 라고 말하는 일은 있을 수 없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야. (<라임 라이더> 중)"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는 사랑이야기들을 듣고 있다보니 나는 갑자기 그녀가(또는 그녀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안쓰러웠다. 사랑의 완벽함 앞에 한없이 작아진 자신을 보며 사랑하기를 애써 포기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해왔던/받았던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닌, 그보다 하찮은 어떤 것으로 정의내리는 모습, 그리하여 '이별'을 통해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려 앴애쓰는 모습이 너무나도 마음아팠다. 책 속 이야기와 저자의 경험(또는 세계관)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혹시 그녀가 일종의 '사랑결벽증'에 걸린 이는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녀는 단 한번도 '어차피 완벽한 사랑을 할 수 없을 바에는 아예 사랑따윈 하지말자'라고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범접할 수 없는 그 사랑의 완벽함과 진실성 앞에서 독자들이 가만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너는 그녀가 없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떠난 거고."

"...미안한데, 조금만 더 자세히."

"그녀가 떠난 후의 너의 삶을 생각해 봐. 뭐가 그토록 중요했어? 네 삶에서? 누군가 대신 해도 괜찮은 일들을 하고,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을 약속 때문에 시간에 쫓기고, 비슷비슷한 영화를 보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사고 아침에 꾸역꾸역 일어나 회사의 네 자리를 채우기 위해 전철을 타러 가잖아."

"...인정해."

"레퀴엠의 본질은 바로 이거야. 인간들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삶의 한없는 사소함이 얼마나 축복받은 건지 깨닫게 된다는 거지. 네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그 산만하고 복잡한 것들이 너를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있는 동안 네 마음은 어디에서 무엇을 구하고 있었던 거야?" (<아보카도 아지트> 중)

 

그래, 과연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구하고 있었던 걸까?

중요하고 특별한 것을 잊어버린 채, 사소하지만 소중한 하루하루를 그저 습관처럼 무심히 보내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소홀히 하다보면 어느덧  우리네 삶과 사랑은 흔하디 흔한 것으로 바래져 버린다는 것을 그녀는 조용히 경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황경신의 <종이인형>을 읽는 동안만큼은 나도 내 마음, 자신만의 진실성을 가만히 되돌아볼 수 있었다.

 

이젠 우리의 "사랑해"란 말을 지금보다 1% 더 짙은 빛깔로 속삭여보자.

또는 100%의 진실이 아니면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다는 생활철학을 가진 이들이라면,

<라임 라이더>의 주인공처럼 이렇게 고백하는 것도 괜찮겠다.

 

"나도 당신을 라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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