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남한산성에 올라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10여 년 전, 남한산성에 가 본 적이 있다. 전공 답사의 마지막 코스였다. 3박 4일 간의 일정으로 모두 지쳐 있던 터라 산성을 오르자는 교수님의 제안이 못내 싫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저만치 앞장서 흙먼지를 내는 교수님을 따라 산성을 오르는 길이 즐거울 리 만무했다. 하나같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오로지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마음에 이게 산비탈인지 산성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런데 30분가량 지났을까 여전히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산성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여유를 찾은 우리들의 걸음이 남한산성을 느끼기 위해 조금씩 느려졌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며 남성미 가득한 이 산성에 호기심이 갔다. “남한산성은 직접 밟아봐야 제 맛이야.” 교수님의 말씀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김훈은 남한산성의 그런 매력을 진작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공원으로 죽어 있는 남한산성을 글로써 살려내려고 한 것이다.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으며 그렇게 어느새 10여 년 전 그곳의 땅을 밟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또 세월을 거슬러 병자호란의 한복판에 있었던 인조 15년에 내가 있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김훈은 글 잘 쓰는 작가다. 생각이 많은 작가다.

남한산성을 살려내기 위해 성 문턱이 닳도록 남한산성을 들락거렸을 것이고, 머릿속이 서재가 될 정도로 철저한 사전 조사와 자료를 수집하였을 것이다. 그것들을 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물 흐르는 듯한 수려한 문장 솜씨는 또 어떠하고. 김훈 특유의 문장 맛에 읽는 즐거움이 더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장으로 발신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서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가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본문 9쪽 중에서)

인조 14년 겨울부터 15년 봄까지 남한산성으로 피난 와 병자호란을 견뎌내던 때의 이야기가 『남한산성』의 이야기다. 그런데 『남한산성』은 누구나 주목할 만한 전투라든가 조정에서 벌어지는 언쟁이나 임금의 고뇌보다는, 굶주림과 추위, 피비린내라든가 흉흉한 민심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이렇게 김훈은 미시사적 관점에서 백성들의 삶을 조명한다. 『남한산성』이 살아있다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인물을 읽는 재미가 있다. 임금부터, 이름 모를 보병까지 캐릭터 하나하나가 제가 가진 의미를 한껏 발휘하고 개성이 넘쳐 인물이 등장하는 빈도라든가 중요성과 상관없이 눈길이 간다.

『남한산성』의 가장 큰 주인공은 ‘남한산성’이다.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주인공은 서날쇠와 정명수, 이 두 사람이다. 그러나 살아가는 방법이 대조적인 두 인물은 실상 다르지 않다. 두 사람 모두 국가라는 대의가 아닌, 자신이 살아가기 더 적합한 방법을 택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딸린 처자식과 소박한 생활에 만족한 서날쇠는 남았고, 인생의 굴욕을 맛보며 가진 것 다 잃은 정명수는 떠난 것이다. 서날쇠와 정명수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변화하는 국민의 모습이라면 뱃사공 아비를 왜 잃었는지도 모르고 눈앞에 펼쳐진 운명에 순응하는 나루는 한 나라를 지탱하는 또 다른 변하지 않는 국민이라는 큰 힘이다. 서날쇠와 정명수, 나루는 과거에도 살았고, 현재도 살고, 앞으로도 살아갈 이 땅을 지키는 백성인 것이다.

백성들이 나무의 뿌리라면 세찬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게 바람길을 터주는 가지는 최명길과 김상헌일 것이다. 충신과 역적이라는 이분법적 구조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관료로서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고 펴 나가는 이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반면 ‘임금’으로 묘사되는 임금은 인조반정으로 권력에 오른 인물이면서도 여기서는 매우 자포자기한 듯 시종일관 힘이 없다.


세 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찧는 굴욕적인 화친으로 남한산성의 겨울은 지나갔다. 살 길을 모색하려던 최명길은 명분의 역적이 되고, 청으로부터 나라를 구함으로써 살 길을 찾으려던 김상헌은 청의 역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킨 왕조는 살아 지금 우리가 그 땅을 밟으며 살고 있고, 정명수와 서날쇠, 나루가 우리가 되어 지금을 살고 있다.

<남한산성> 학고재, 2007년, 383쪽, 1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