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 이상원 옮김
에코의서재
생각하는 인간에서 놀이하는 인간으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놀이 탐구
사람 뒷모습이었기 망정이지 책표지부터 예사롭지 않다. 작년에 본 영화 <향수>의 하이라이트 장면 만큼은 아니지만 따분한 독자의 눈을 잠시 낚아챈다거나 한층 확대시켜 줄 만한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 역시 걸려들었다. 얼마간 표지도 못 넘기고 거기(어디? 뭘 묻나..거 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자유로울까. 그들...'
미야베 미유키라는 일본 작가는 지구 어디든 뛰어들고야 마는 못말리는 청춘들에게 '언제나 마음에 반바지를 입고 잠자리채를 들고 뛰어다니는 맑고 어린 영혼의 소유자들'이라고 말했다는데 나는 그럼 마음에 반바지도 못 입고 책장을 넘겨야겠네. 벌거숭이 시절을 생각해 본다.
'그때는 지금처럼 지식이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지도, 멋진 집과 화려한 옷이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자기 자신을 지식·집·옷 따위로 칭칭 둘러싸고 방어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야. 만약 지금 우리에게 능력껏 가장 좋은 '쯩'을 획득하지 않아도 되고 값비싼 주택을 구입하려고 뼈빠지게 일하지 않아도 되고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게 될까?'
그렇지 않아도 100만원을 훌쩍 호가하던 핸드폰이 몇 달 지나지 않아 냉장고나 탱크라고 불리며 웃음거리가 됐던 일이나 평생 직업의 발판을 마련해 주리라 철석같이 믿었던 전공'쯩'이 배신을 때린 일은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전처럼 맹목적으로 누군가 다녀갔던 길을 따라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걸 예시한다. 여기에 더해 연예인이 아닌데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길 요구받는다. 그러면? 그동안 능력껏 얻어냈던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잃어버린 줄로만 알고 있는 창조적 놀이 본능에 눈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한 번 그래보자고 온몸으로 설득하는 책이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이다.
이 책의 부제에서 눈에 띄는 문구인 '생각하는 인간에서 놀이하는 인간으로'는 1930년대에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Man the Player]'으로 지칭한 요한 호이징하의 저서 『호모 루덴스』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놀이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정신"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놀이
도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 . . 동물은 논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동물은 기계적인
물체 이상이다. 인간은 놀며, 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분명 인간은 이성적 존
재 이상이다. 왜냐하면 놀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13쪽
말하자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놀이 본능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를 발휘하여 문명 · 문화를 꽃피웠다고 하는 사실을 전한다. 바이올린 연주자인 저자 스티븐 나흐마노비치Stephen Nachmanovitch도 이 책을 통해 독자가 놀이 본능을 기억해 내고, 거기에 흠뻑 취할 수 있도록 '놀이'라는 이름의 창조적 샘물을 펑펑 퍼올려 준다. 그러다 자칫 빠질 수 있는 놀이 장애물은 훌쩍 건너 뛰어서 - 20세기 초, 미국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가 불평하는 대신 '속물들과 대항해 싸우는 즐거움'을 만끽했다고 한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 자신의 별에 가 닿으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골인할 지점은 바로 그곳이 아닌가 싶다.
"성숙한 예술가는 마치 나선을 돌듯 어린아이의 놀이 상태로 계속 되돌아온다.
하지만 그 길로 돌아오기까지 고난과 시험을 거쳐야 한다." (240쪽)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거리에서(trio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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