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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만화에 빠진 아이, 만화로 가르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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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 빠진 아이, 만화로 가르쳐라
한창완
웅진리빙하우스

1.
    10년 전, 아니 훨씬 이전 나는 만화는 비로소 대접을 받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10년 후, 또 앞으로도 만화는 썩 좋은 대접은 받을 것 같지는 않다.  단지 내 생각일 뿐이었다.  10년 전, 아니면 훨씬 이전에도 나는 만화 대여소에서 죽치고 쭉 하루를 보낸 적이 없다.  하지만 만화를 좋아한다. 10년 전 이미 만화를 완전히 놓아버렸으니 분명 나는 말뿐인 만화애호가이다.  하지만 아직도 좋아하는 책이 만화라는 사실은 유효하다.  유독 많고많은 유형의 책 가운데 만화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분명 만화를 좋아한다. 의식적인 겉치레가 아니다. 내 몸이, 가슴이 말을 하고 있다. 만화, 내 사랑.

   교육이란, 나는 아쉽게도 지적이고 훈계요 비난이고 멸시로 학습하고 말았다.  아무리 애쓰고 바둥거려도 따라갈 수 없는, 장거리 달리기에서 한 번 자빠지면 결코 선두를 넘볼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완주야말로 진정한 승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나는 교육은 절망이었다.  내게 학교에서의 추억을 들라치면 하나뿐이다.  수업종이 울리고, 다들 교실로 들어가는데 나는 학교 운동장 구석에 있었다. 혼자 타는 시소는 참으로 재미있다.  정말 재미있었을까.  구구단을 못 외고, 받아쓰기 빵점이 익숙한 아이는 늘 오줌이 마려워 의자에 엉덩이를 착 붙이고 앉아 있기가 불편했다. 지독한 시간이었다. '삯'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서 옆자리 학생에서 물어보고도 의심을 했다. 내가 잘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삯'의 입말이 '삭'인지 '삿'인지 늘 난감했다. 

2.
    <만화에 빠진 아이, 만화로 가르쳐라>를 읽었다. 교육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다시 배우기 위해서냐를 놓고 혼자 분분했다. 말 안 되는 짓이다. 한 권 책을 선택하는 데에는 분명 목적이 있다. 호기심이 동기를 유발하든, 심심풀이 시간 죽이기용으로 책을 집어들었든, 책읽기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 의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나의 읽기'에는 분명 의미가 있게 마련이다. 스스로에게 침잠하는 것은 호기, 우울과는 거리가 멀다. 논리를 내세워 조목조목 이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때때로 달콤쌉쌀한 맛이 돈다.

    한때 나도 책이 좋았는데, 그것이 만화라 부끄러웠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냐 물어오면 '국어사전'이라 한 것도 분명 '만화'를 대신해서 준비한, 딴에는 심각하고, 또는 기발한 답변이었다. 그러다 오래 만화를 잊고 지내던 10년 전 책을 진저리치게 싫어하던 나는 책 한 권을 사들고 오래 읽었다. 만화가 아닌, 그러나 그림이 많아 읽기에 수월했던 그 책은 박재동 화백의 <만화 내 사랑>이다. 한 번 끼니를 거르고 또 거르면 나중에는 배고픈 줄 모르게 된다. 끝모르게 지속되어 온 지독한 외로움은 적응이 아니라 둔감이다.

    천둥벌거숭이로 취급받아온 만화, 왜 한국만화는 재미가 적나 왜색 짙은 일본만화 해적판에 열광하던 중학생 틈바구니에 나도 끼어앉아 있었다.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진정 교육이 된 만화였다. 우리것이 없는 황폐한 종이, 손바닥만한 만화책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반토막나 버리는 꼴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500원짜리 만화책을 보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닌 것도 역시 아니다.

3.
   최상의 교육은 놀이다. 놀면서 배운다는 것, 놀이는 놀이요, 공부는 공부라는 틀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혁명이다. 반역이다. 한데 여직껏 반역을 꿈꿔왔으니 이방인이 돼버리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교육 바깥에서 놀기도 제대로가 아니었던 나는 결국은 '만화'와도 가까이 두고 친해질 수가 없었으니, 딱할 노릇이다. 때때로 고급만화로 불릴 만한 책들을 찾아다녔지만, 절판이 다반수고 기껏해야 일본만화 몇 권 손에 들면 역시 일본만화 최오라는 허망한 소리만, 아니할 소리로 주어담고 있었다. 시큼한 신김치가 먹고 싶다.

   <만화에 빠진 아이, 만화로 가르쳐라>는 놀이를 다루고 있다 하기에는 미심쩍다. 하지만 교육이라, 여태 내 몸에 악취처럼 여겨지는 교육이라 하기에도 뭔가 미심쩍다. 해서 나는 이 책을 '인간존중'의 기본서라 부르고 싶다. 개론서라고 하자. 왜냐면 만화를 '읽는' 아이와 만화로 이야기를 시도하게끔 글쓴이는 친절하게 조언하고 있다. 부모자녀의 대상관계에서 늘 말썽은 '아이의 변화'를 성급하게 바라는 '부모, 양육자'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에 빠진 아이, 만화로 가르쳐라>는 먼저 만화를 '읽는' 아이를 무조건적인 관심으로 바라보기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당연 이 책의 주대상자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양육자다. 그러니 자유분방한 아이들을 숙련된 학습자로 쉽게 끌어올리는 기술만을 탐한다면, 자칫 괴로울 것이다. 부모는 아이가 변화기를 바라지, 자신이 변화기를 바라지 않다. 절대선이 곧 부모요, 아이는 미성숙의 극치로 보기 때문이다. 뻔할 뻔 자다. 게다가 아이가 만화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경우는, 생각에도 끔찍하다. 만화는 곧 악서(惡書), 선정적이고 폭력성이 짙어 최단시간에 아이를 모방범으로 몰아가는 몹쓸 도서. 책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불량하다고 한다. 만화만을 탐독하는 아이, 무엇이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왜 아이는 만화에만 집착을 하는지에 대해서, 진정으로 아이를 이해하려 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따져물어야 할 것이다.

  <만화에 빠진 아이, 만화로 가르쳐라>는 그렇게 인간존중을 전제로 서술하고 있다. 지극하고 무조건적인 관심으로 아이에게 다가가기를 종용한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독서지도 이론상의 설명 역시 알차게 들어차 있는 <만화에 빠진 아이, 만화로 가르쳐라>는 단순히 만화예찬론만을 펼치지 않는다.

4.
    만화를 읽어야겠다. 아이와 함께 읽어야겠다. 내가 읽어주는 만화, 아이가 제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만화가 얼마나 재미있고 우리 사이를 돈독하게 해줄지, 사실 미지수다. 하지만 아이가 읽고 있는 만화,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면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은연중에 깨닫게 된다. 아이뿐 아니다. 곁에 있는 누군가가 관심으로 무엇에 몰두하고 있다면, 우리는 심리적 거리를 좁힐 만한 큰 선물을 얻은 셈이다.
    "지금 만화책을 읽고 있구나."
그렇게만 말해보자. 우선은. 이 말에는 비아냥이 전혀 없다.


인상깊은 구절

대개 유치원 때와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아이들 대부분이 학교에서 있었던 조그마한 일이라도 엄마와 아빠에게 이야기한다.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한 아이들, 이런 모습은 유아기와 어린이 시절의 좋은 모습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고등학생이 되면, 갑자기 부모와 대화가 줄어들고, 돌연 대화를 중단해버린다. 특히, 남학생의 경우, 친구와의 대화가 대부분이며, 부모와는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한다
(140쪽/ 만화를 통해 아이와 더 친해지기)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환(key18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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