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둘러보았다. 키대로, 종류대로 가지런히 꽂힌 책 사이에도, 순서 없이 누워있는 책 어디에도 연애소설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연애소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 것은?
비록 통계자료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20~30대 싱글 여성과 성숙한 꿈 많은 10대 여학생들이 주 독자층일 것이라 생각한다. 철저히 나의 개인적 경험과 견해에 빗대어 싱글을 벗어나는 그 어느 시점부터 연애소설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장르로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완벽한 사랑을 찾는 연애소설을 더 이상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연애소설을 모두 그저 그런 책들로 치부하고 멀리하였다.
《I LOVE YOU 》 얼마나 통속적인 제목인가. 기성문학이 아닌 추리소설, 연애소설 작가, 게다가 남성 작가들의 사랑 이야기, 뭐 그리 대단할 게 있나 싶었다. ‘일본 소설이라 하면 무라카미 류 정도는 되어야지.’ 하다가 문득 나의 오만함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보니 ‘그럭저럭 읽을 만 한걸.’에서 ‘제법 괜찮은데.’까지 오게 되었다.
몇 해 전부터 유행처럼 출간되고 있는 일본 신예 작가들의 릴레이식 단편 연애소설, 다분히 출판사 입장에서는 손쉽게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란 계산 하에 만들어진 책으로 보인다. 여섯 작가의 여섯 가지 사랑 이야기는 진흙 속 진주 같은 작품과,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가 섞여 있다.
이사카 고타로의 〈투명한 북극곰〉. 기발한 소재와 깔끔한 문체가 돋보인다. 덕분에 첫 번째 이야기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우연히 동물원에서 행방불명된 누나의 마지막 애인을 만난 유우키, 하나씩 누나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어디서든 ‘이어져 있다’는 믿음은 뜨거운 연애감정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신뢰라는 사랑의 핵심임을 확신한다. 이시다 이라의 〈마법의 버튼〉은 오랜 친구 사이가 연인으로 발전하는 내용인데 이야기도 평범한 데다 흔한 드라마 소재라 눈길을 끌지 못한다. 나카무라 고우의 〈뚫고 나가자〉는 연애소설보다는 성장소설이 더 어울리겠다. 게다가 이 역시 진행 방식이 -작가의 의도하는 바는 전혀 다르지만-어디선가 본 듯하고, 습작 정도로 느껴진다.
이치카와 다쿠지의 〈졸업사진〉, 나카타 에이이치의 〈모모세, 나를 봐〉, 혼다 다카요시의 〈Sidewalk Talk〉는 개인적으로 아끼는 단편이다.
스타벅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파도에 일렁이는 듯한 감정의 변화를 재치 있는 필치로 그린 〈졸업사진〉은 역시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이치카와 다쿠지라는 감탄을 자아낸다. 비교적 전형적인 일본 학원물이라는 틀 안에서 〈모모세, 나를 봐〉는 다변적인 인물 성격 구성에 성공했다. 어느 등장인물도 소홀하지 않고 캐릭터를 부여한 덕분에 감각적인 소설이 되었다.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해도 좋을 대목들도 흡족하고. 마지막 이야기인 〈Sidewalk Talk〉는 마치 어둑한 레스토랑의 조명 아래 앉아 있는 것처럼 담담한 어조로 이혼을 앞둔 부부의 이야기를 한다. 남자는 여자가 표현하지 않아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갔을 많은 것들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여자의 향수 냄새에 깨닫는다. 아마도 이후 두 사람은 지금보다 행복할 것이다. 표현하지 않는 여자처럼 작가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글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그들의 결혼 생활을 십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남성 작가들의 로맨스라 해도 투박하지 않다. 매우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해 가끔 가슴 설레기도 했다. 이 정도라면 한 두 권쯤 연애소설이 책장에 꽂혀 있어도 나쁘지는 않겠지.
I LOVE YOU
이사카 고타로 외, 해냄, 2007년, 11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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