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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에브리맨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9.10.15
펑점

한 평범한 사람이 늙고 병들고 죽는 이야기 - 어떤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감동!

 

이름이 나오지 않은 어떤 사람,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을 위해 그의 형 하위와 형수, 그의 첫번 째 결혼에서 생겨난 아들인 랜디와 로니, 그의 세 명의 부인 중 두번 째 아내인 피비와 그녀의 딸인 낸시, 그가 심장 수술을 받고 퇴원했을 때 그를 간호했던 모린, 그와 뉴욕에서 같이 광고일을 하던 동료들 몇 명과 그가 이주한 은퇴자 마을 스타피시비치에서 연 그림교실에 수강하던 노인들 몇몇이 모였다. 여느 장례식처럼 진실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 짓는 사람도 있고, 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가 죽은 것을 씁쓸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의 죽음을 애통하는 사람도, 그가 죽어서 속시원하다고 사람도 있었던 단촐한 장례식이었다. 그 장례식은 이제는 황폐화되어 옛 영광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묻혀져 있는 유서깊은 곳에서 열려졌다. 이민자를 정착시키는데 도움을 줬던 그의 할아버지가 이 묘지를 만들 때부터 참여하면서 ‘죽은 사람들을 유대 율법과 의식에 따라 매장하기’ 위한 곳이라고 문서화했건만 시간이 가면서 많은 것들이 썩어 쓰러졌고 문은 녹슬었고 자물쇠는 사라지고 심지어는 문화 파괴 행위가 일어난 허망한 곳이 되어 버렸다. 마치 그의 죽음처럼 말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제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소설은 죽은 그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들려준다. 그의 일흔 하나일 때의 모습, 그의 아홉 살의 수술한 기억, 그가 서른넷일 때의 피비와 만난 이야기, 그가 쉰여섯일 때의 세 번째 아내와 겪은 수술이야기, 그리고 그 때 모린과 만난 이야기, 피비와 이혼한 계기 등의 여러 이야기가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떠오르면 연관된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막 끄집어낸 것처럼, 그렇게. 그런 이야기를 통해 그는 광고일로 성공했으나 순간적인 실수 때문에 안정감 있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놓치고 평생을 외롭게게 병마와 싸워가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그의 형 하위와는 전혀 다르게. 오십 평생을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헌신하며 평생을 병이라곤 모르고 사는 형 하위하고는 전혀 달랐다. 글쎄, 그런 그가 특별해서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아닐게다. 세 번의 결혼을 모조리 실패하고, 자신에게 지극정성을 기울인 딸 낸시에게 상처를 줄 불륜행위를 저지르고,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다이아같은 아내를 쓸모없는 아내로 바꾸어버리는 실수만 하는 모자란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그의 못난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런지. 아마 완벽해 보이는 하위가 이 책의 주인공이었더라도 어쨌든 ‘죽음’은 무시무시한 것이니까.

 

그가 서른넷일 때 문득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이 무서워졌다. 한국전쟁에 나갈 때도 그렇게 느껴진 적이 없었던 그인데, 아직 서른넷밖에 안 되었는데 죽음의 공포가 그를 뒤따랐다. 그 후 바로 병원행, 충수염이었다. 아마 그 때부터일 것이다. 그가 병원 신세를 자주 지게 된 것은.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를 잠식하는 가운데 그는 두번 째 결혼과 세번 째 결혼을 감행했다. 두번 째는 충수염 수술 중에 굳건히 옆을 지켜주는 피비라는 존재를 새롭게 알게 되어 시작된 것이지만, 세번 째는 그저 심장수술을 할 때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는 셋째 아내 메레테의 실상을 알게 되었던 뿐. 그리고 이혼. 그리고 시작된 홀로살기는 처음엔 흥미로웠다. 바다 옆에 있는 은퇴자 마을에 들어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포부를 내세우며 열정적으로 살았던 십 년이 지나니, 어떤 것으로 채워질 수 없는 외로움이 그를 뒤따랐다. 그리고 따라오는 죽음의 공포, 공허, 다시 수술이 필요한 몸, 건강한 형을 질투하는 치졸한 마음, 자신이 버린 두 아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갈망, 낸시와 쌍둥이 아이들과 같이 살고싶은 그의 마음, 그리고 피비.... 그러다 피비에게 뇌졸중이 일어나고, 그의 동료들이 죽거나 우울증에 사로잡히거나 암에 잠식당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피비에게 가보고, 미망인에게 전화로 조문을 대신하고, 정신병원에 연락하고, 농담을 하며 위로하는 그 시간... 위로랍시고 진부하기만 하고 쓸모는 없는 격려 발언을 늘어놓고 동료들의 삶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그들의 기운을 되살리려 노력하고, 삶의 마지막 가장자리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말을 찾으려 하는 그 황당한... 시간들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일하면서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의 삶을 놓고 봤다면, 글쎄, 허무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괴로운 사투를 알았다면 그는 전화를 붙들고 수백 통은 했어야 했을 테니까.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p. 162)

 

그러다 부모님의 묘지에 갔다. 뼈들이 들려주는 그런 고귀한 말씀과 힘들고 정성스럽게 땅을 파는 인부의 사려깊은 이야기 속에서 그는 위안을 얻었다. 그때, 바로 그때서야 서른넷 때부터 그를 따라다녔던 죽음의 공포를 놓을 수 있었다. 지겹던 바다도 희망차게 보이고, 그림에 대한 새로운 열망도 생겼으며, 거친 파도가 몰려와도 다시금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심장수술을 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노년은 대학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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