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우울증 생활
우에노 레이
열린과학
유쾌하게 씌어진 우울증
'우울증' 이라는 흔한 병이 있다. 우울증 환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가 우울증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이 책 제목은 이상하게 모순적이었다. '유쾌한' 우울증.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우울증이라는 흔하지만 낯선 병에 대해, 유쾌한 입담으로 풀어나간 책이다. 도저히 우울증 환자가 썼다고 믿기지 않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우울증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가슴 한쪽이 시큰거리는 책이었다.
잠깐 우울증으로 가기 직전의 상태였을 때가 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다. 극도로 불안하고 모든 세상이 나를 쥐어짜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암담한 상태. 그곳을 헤쳐가기 위해 허우적거려봐야 눈앞에는 빛 한 점 없고 손에 닿는 것은 텅 빈 허공일 뿐이던 그런 적이 있었다. 그 때 인터넷으로 가볍게 우울증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었는데 수치가 상당히 높게 나왔었다. 물론, 인터넷에서 그냥 아무거나 한 거라 신뢰성은 없다고 판단했지만. 책을 읽다보니 새삼 그 때 기분이 떠올랐다. 어쩌면 진짜 그 때 우울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성실하고 꼼꼼한 사람, 약속을 하면 안 지키고 못 배기는 사람, 완벽주의자. 이런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타입이라고 한다. 불행하게도 나는 위의 사항에 모두 부합하는 인간이다. 그 당시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완벽을 추구했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힘들고 안 된다 싶으면 될 때까지 밀어붙이고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말거나 가슴 너머로 흘려버리면서 앞만 보고 달렸다.
어느 날, 앞에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다. 속을 마구 긁어놓는 인간들도 하나씩 앞을 가로막고 마침 집안에도 안 좋은 일이 터져버려서 내 기분은 완전히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기회만 봐가면서 나한테 이것 저것 맡기는 인간들.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을 십분 활용하여 나를 압박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계속 땅으로 꺼져서 지구 반대편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할 일을 하나씩, 최대한 집중해서, 완벽하게 하고자 더 파고들었다. 그 때는 학기 중이라 집에서 떨어져있었는데, 그렇게 내 일에 집중하다보니 집안의 일에 신경을 못 쓰게 되었다. 그것이 또 너무 미안하고, 그들을 외면한 내가 미워서 더 잊으려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죄책감과 자기혐오가 강해졌다.
성실하고 꼼꼼한 완벽주의자들은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완벽을 추구하도록 자신을 몰아붙이다가 결국 지쳐서 우울증이 된다고 한다. 내가 딱 그 경우였다. 인간관계에 혐오를 느끼고 인간을 마주하는 것도 싫어지는 증상까지 똑같았다. 그렇게 가슴이 아플 정도로 공감하고 난 뒤에야 나는 이 작가가 정말 우울증 환자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증상들도 내가 처해있는 상황과 그린 듯 똑같아서 내가 진짜 우울증인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의욕이 없고 몸이 처진다. 침대에 하루종일 뻗어서 힘없이 늘어져있다.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에 안 잡히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는다. 지금도 할 일이 넘치는데 손에 하나도 안 잡혀서 미루고만 있다. 이제 제 날짜 맞추려면 죽었다, 라는 생각이 드니 더 힘들다. 이럴 때는 휴식이 필요하다는데 휴식을 취할 여유도 힘도 없다.
'천천히, 천천히, 조금은 여유로워도 괜찮다.' 이 책에 나오는대로 가만히 주문을 걸어본다. '시간이 없다, 해야하는데 너무 바쁘고 빠듯하다.' 라는 생각 대신 조금만 느슨해져도 마음이 훨씬 편하다. 물론 할 일의 양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내 동생은 한창 공부할 고등학생이다. 성적도 잘 나오고 본인 스스로도 열심히 한다. 그런데 요즘 방학이라 자꾸만 놀게 된다고 힘들어한다. 공부해야하는데 손에 안 잡힌다고 계속 자책한다. 나는 동생에게 짧게 한 마디를 해주었다. '괜찮아. 너무 몰아붙이지 마. 그러다 공부라는 벽을 쓰러뜨리기 전에 니가 먼저 쓰러져. 그렇게 지쳐버리면 그 때는 아무것도 못 해. 공부하겠다는 생각조차 못하지. 그러니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분명 엄마나 아빠가 들었으면 동생 공부 방해나 한다고 말씀하셨겠지만 그 말을 들은 동생은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 보였다.
'힘내라' 대신에 '괜찮아' 라는 말을 해준다. 이것이 책에서 말하는 우울증 환자를 대하는 원칙중 하나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미 몸의 에너지를 모두 뽑아 써버려서 지친 사람에게 힘내라고 하면 더 화가 날 뿐이다. 주위에 고3이나 수험생, 그 외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힘내라' 는 말 대신에 '괜찮아' 라고 말해주자. 그것이 그들에게 더 힘이 된다(고3한테 수능 얼마 남지 않았다고 힘내라며 압박을 주는 것은 절대 금지다. 화나서 공부 더 안 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우울증은 병이다. 병은 분명 몸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작가는 '우울증에 걸림으로써 배울 수 있는 것' 에 대해 언급한다. 자신의 생각, 생활의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다고 해야할까, 그런 의미이다. 불행과 행복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부정적인 생각의 고개를 돌려 좋은 면을 바라볼 수 있다. 쉬어야 할 때를 조절하고 무리하지 않게 조심한다. 우울증으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된다.
나도 집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처음엔 원망했고, 그 다음은 잊으려하고, 그리곤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 도중, 나는 작고 소중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가족' 이라는 구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이 있었고, 그 속에서 행복했기에 지금 이렇게 힘들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애초에 가족이 없었다면 그 행복도, 그 괴로움도 없었을테니. 그래서 괴로워하기보다 그런 행복을 가져다 준 가족에 감사하게 되었다. 일이 잘 풀리고 난 뒤에, 가족의 결속이 강해진 것은 물론이다.
우울증은 분명 우울하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마라, 작가는 이야기한다. 자신이 우울증환자로써 겪었던 많은 일들, 자살미수, 입원, 항우울제, 가슴의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듯한 절망감을 말하며 공감을 얻어내고 희망을 심어준다. 비록 항우울제를 복용하며 집필한 책이지만, 그래도 많이 위안이 되는 이야기이다. 우울은 개성이다, 까다롭게 굴지 말고 무리하지 마라, 쉴 때는 쉬어라.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마음에 위안을 주는 책이었다. 100마디 좋은 말보다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나는 우울증이었을지도 모르고 지금도 우울증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우울하다고 좌절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우울하게 축 처질 때가 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자책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냥 그대로 살면 되지 않을까. 그럼 이 작가처럼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우울증과 한몸이 되어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나가비(wicked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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