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교실
손창섭 지음
예옥
다양한 인간군상이 펼치는 욕망의 하모니
고등학생 때 <비 오는 날>, <잉여인간> 등의 단편소설을 통해 만나본 저자를 실로 오랜만에 <인간교실>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됐다. <인간교실>은 60년대 초 8개월여에 걸쳐 신문에 연재됐던 소설로 당시의 세태를 그린 사회적, 정치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 자신이 60년대를 살지 않았고, 그 시대에 관한 역사적 지식도 편협한 터라 저자가 소설에 부여한 정치적인 의미들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래서 나는 '세태'라는 큰 틀 속에서도 오로지 '인간의 욕망과 성격' 이라는 측면, 즉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중심으로 한 구체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춘 채 인물들이 추구하는 요체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읽어 나갔다.
주인갑 씨는 사업과 정치에서 연이은 실패를 맛본 실직자다. 남혜경 여사와 사는 그에겐 가족이라곤 전처소생의 딸과 식모 아이 뿐이다. 식구가 적어 남는 방을 놀리기가 아까워 주인갑 씨는 세를 놓기로 하고 사람을 물색한다. 때마침 어린 딸과 함께 방을 구하던 단아한 용모의 황 여인이 주인갑 씨의 눈에 찼고, 내심 황 여인을 두고 볼 마음에 그들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딸아이는 곧 어디론지 가버리고 황 여인은 김두형이라는 청년과 동거를 시작한다. 황 여인을 몰래 흠모하던 주인갑 씨로선 어리둥절한 일이었고, 아내를 통해 전해들은 황 여인의 사정은 더욱 기가 막혔다. 게다가 일이 이상하게 꼬여 황 여인과 부쩍 친해진 남 여사가 황 여인은 물론 김 청년과도 야릇한 관계를 맺는데다가 황 여인의 남편 서 씨가 여인의 거취를 두고 다짜고짜 행패를 부리는 등 사건은 겉잡을 수없이 커져가고 주입갑 씨의 시름도 깊어가는 가운데 결국 황 여인이 집을 나감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된다.
황 여인이 머물던 방은 이내 두 명의 여대생들로 채워지고 머지않아 주인갑 씨의 골치를 썩이는 일이 또 생긴다. 알고 보니 두 학생 중 윤명주라는 학생은 이미 퇴학을 맞아 학생신분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몸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 젊은 아가씨들에게 안동철이라는 다부진 남학생까지 가세해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었다. 주인갑 씨는 그들의 사업설명에 대경실색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들의 '사업'에 방관 혹은 소극적인 동조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들의 사업이 지나치게 커지고 자신의 주거권도 위협을 받자 주인갑 씨는 완전히 발을 빼려 하지만 은근한 압박을 걸어오며 사업 참여를 강권하는 그들에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주인갑 씨는 그들을 돕는 척 얻어 낸 정보를 가지고 그들의 손에 집이 헐값에 넘어가기 전에 간신히 집을 팔아 도피 아닌 도피로 귀농을 선택해 새 삶을 시작하기로 한다.
<인간교실>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교실'처럼 전혀 다른 인격을 지닌 가지각색의 인물들이 주인갑 씨의 문화주택이란 공간 안에서 펼치는 결혼과 성 풍속에 관한 다분히 실험적인 이야기다. 특히 주인갑 씨가 여러 여인들에 둘러싸인 형국이 되면서 남녀사이 또는 부부사이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인갑 씨는 결혼과 성에 관해 자신이 속한 세대보다는 진보적이고 평등적인 관점을 지닌 사람이다. 그렇기에 부부생활에 있어서도 어느 한쪽의 방종만 인정하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며, 정도를 지나치지 않는 외유는 부부사이를 윤택하게 하는 것이라 믿는 사람이다. 부인인 남 여사도 어느 정도 그의 생각과 일치되는 부분이 있으나 본디 아내들이 갖는 질투심만은 어쩌지 못하여 남편인 주인갑을 늘 감시한다. 애정표현에 소극적인 남편에 비해 적극적인 그녀의 애정공세는 되려 주인갑 씨의 불만을 일으키고 부부관계를 서먹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한편 차분하고 단아한 모습의 황 여인은 주인갑 씨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지만 아직 부부의 연을 잇고 있던 주인갑 씨의 상황과 정리되지 못한 남성관계로 지쳐있던 자신의 처지로 주인갑 씨와의 화합은 어려워진다.
황 여사가 떠난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두 아가씨와 안 청년 역시 성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있어서 주인갑 씨와는 사뭇 달랐다. 우선 그들에게 성, 특히 여성성은 사업 획책의 수단이자 수컷들의 양심을 조롱하는 무기였다. 그들이 펴는 사업이란 게 뒤가 구린 인사들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사기였으니 음성적으로 여성과 관계하는 소위 사회의 지명인사들이란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의 이런 파렴치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에 연민을 느끼게 되는 건 윤민주의 불행한 과거에의 복수라는 처참하게 짓밟힌 한 젊은이의 생존투쟁이란 점 때문이다. 농락당한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응당 받아야할 대가로써 지명인사들의 돈을 뜯어내는 것이 심적으로나마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철저한 계획 하에 인사들의 부에 맞춰 할당량을 정해 돈을 갈취하는 모습은 젊은 그들이 해야 할 선택으로는 보기 어려웠다.
<인간교실>은 그렇게 주인갑 씨의 문화주택 안에 자리한 인물들을 모습을 통해서 결혼의 의미와 부부의 존속 그리고 진정한 부부의 형성 등에 관한 문제에서 남성과 여성의 동등성 문제와 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결혼과 성의 당시 세태에 대해 세세히 다룬다. '인간교실'이란 제목처럼 정해진 공간 안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인간모습을 내보인다. 물론 그 모습 하나 하나가 그 시절에 볼 수 있는 정형화된 모습이라고 할 순 없지만 사건이 전개되고 점차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드러나는 인물의 본모습을 통해 생활의 이면들을 들춰내 사실에 대한 몰이해와 속마음과 행동의 불일치,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를 묘사해 보여준다. 이는 보순이를 향한 주인갑 씨의 마음을 남 여사가 점점 더 오해하는 부분과 황 여인을 향한 주입갑 씨 행동의 변화, 주변 여인들을 향한 주인갑 씨의 유희적인 시선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주인갑 씨는 그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안착하려한다. 그의 마음에 남은 황 여인에 대한 꺼지지 않은 불씨와 보순이가 안고 있는 그를 향한 불씨가 또 어떻게 피어오르게 될 지 새로운 교실 속 인간의 풍경이 퍽 흥미롭게 그려질 것 같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메롱히히(l21k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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