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모션
사토다카코
노블마인
천천히 그리고 또 천천히..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열명 남짓 모여 모임을 만들었더랬다. 그 친구들 중 말투와 행동이 유난히 느렸던 한 친구가 있었다. 심지어는 술,담배 조차도 우리보다 늦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친구의 별명은 매우 느리게를 뜻하는 음악 용어인 '아다지오'였다. 전반적으로 급한 성격을 나타내는 우리 경상도 남자들의 모임에서 녀석은 쉽사리 적응을 못했고 결국엔 제일 먼저 연락이 끊긴 친구가 되었다. 우린 그랬던것 같다. 매번 빨리빨리 종용하기만 했을 뿐 한번도 녀석처럼 같이 느리게 또 천천히 가본적은 없었던것 같다.
얼마전 그 모임의 친구들이 모였을때 한 친구가 시내에서 우연히 아다지오를 만났노라고 그의 근황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도 하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더라고 그간 연락을 끊고 지내서 미안했다고 너희들 다 보고싶다고 말이다.약삭빠른 이들이 득세하는 이 세상에서 항상 조금은 느렸던 녀석이 손해나 보고 살지나 않을지 걱정했었는데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결국 빨리 가든 천천히 가든 모두 다 비슷비슷하게 살아갈 거였으면서 그땐 왜 그렇게 느리다고 타박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우리에게 한번쯤 천천히 느리게 살 것을 권하고 있는듯 하다.
이 책은 사토 다카코의 성장소설이다. 주인공 치사의 가족은 '블랙빈 패밀리' 이다. 번역하면 콩가루 집안이 되겠다. 까만콩은 몸에 좋기나 하지 콩가루 집안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게 하등 도움이 되질 못한다. 교사로 일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그리고 배다른 반항아 오빠, 이런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위태위태하게 하루를 보내는 엄마. 그런 가족들과 함께하는 치사의 일상은 한마디로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치사는 레이코가 이끄는 소위 말하는 '노는애'들의 무리와 어울린다. 적절히 불량스런 짓도 해가면서 적절히 오이카와란 친구를 왕따도 시켜가면서 그렇게 말이다.
그러던 중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오빠가 드디어 사고를 치기에 이른다. 느닷없이 여고생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고 치사의 학교에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항상 모든 행동을 '슬로모션'으로 해서 왕따를 당하는 특이한 그 아이 오이카와를 찍게되고 필름을 돌려달라고 실갱이를 벌이던 그 순간 이후로 치사의 생활은 변하게 되었다. 일생에 참 도움이 안되는 그 오빠 때문에 신경이 쓰여 오이카와를 상대해야 했던것. 그 일로 치사는 레이코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고 오이카와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형무소에 복역중이고 여고생의 냄새라고는 전혀 풍기지 않는 쓸쓸하고 적막한 공간에서 혼자 살고 있던 오이카와. 치사는 오이카와가 왜 매사에 슬로모션으로 행동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그런 아버지의 욱하는 급한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아 언젠가는 자기도 사고를 크게 한 번 칠것같아 일부러 느린 행동을 택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절대로 화를 내지 않게 될것이라고.
아버지와 오빠가 크게 싸운 후 오빠는 가출을 하였다. 오빠가 갈 만한곳을 다 찾아가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오이카와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뜻밖에도 오빠는 오이카와랑 동거중이었다. 그래서 치사는 오이카와의 집을 자주 찾아가게 되고 그녀들은 좀 더 깊은 친구가 되었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치사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아플때 곁에 있어주고 오토바이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저는 오빠를 위해 같이 느리게 계단을 오르며 재활을 도와주는 모습을 통해 치사는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다 생각했던 오빠와 특이한 왕따 친구 오이카와를 이해하며 한 뼘 더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소소한 일탈과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담임선생님과 오이카와의 백부란 사람이 그 집을 들이닥쳤던 것이다. '자넨 누군가'란 백부의 질문에 '전 짜파게티 요리사인데요'란 변명도 못하고 그녀들을 도망시켰던 오빠. 그리고 세상을 향해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던 그 모습. 결국 오이카와는 백부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치사와 오빠의 곁을 떠나게 된다. 오빠도 집으로 돌아와 조금은 더 변한 모습으로 자기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의지를 보이며 그들의 짧은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책을 통해 필자는 잠시나마 '느림의 미학'에 관해 생각을 해보았다. 매일매일 계획에 의해 꽉 짜여진 바쁜 일상. 헛되이 보내는 단 몇분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치밀함. 남들만큼 치열하게 보내지 못했던 20대의 삶에 관한 반성이라고 스스로 정당화 시키고는 있지만 한번씩 스스로도 숨이 턱턱 막히곤 한다. 그러다보니 누구 하나 내 삶에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다. 스스로가 바빠 죽겠는데 남들을 돌아다 볼 여유가 있겠는가.
눈을 감으면 느린 몸짓으로 보조를 맞추어 계단을 오르내리던 잇페이와 오이카와의 모습이 떠오른다. 잠이 덜 깬 거북과 요통을 앓는 달팽이 같은 그 두사람의 모습.
그때의 난 왜 느리게 사는 친구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결국엔 우리 모두 다 비슷한 모습으로 살거였으면서..
간결한 문체로 그려낸 한 폭의 투명한 수채화 같은 책이었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책든남자(terius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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