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파피용》은 지금까지 그가 그려온 이야기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출발점으로 보인다. 《개미》부터 시작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던 소재들이 마치 카메오 출현하듯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다, 이것들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파피용》이라는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음 작품은 이전까지와 확연히 다른 새로움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파피용》은 독자들을 책 속에 빨아들이는 매력이 넘쳐난다. 본론으로 직면하는 과감함과 간결하면서 응축된 문장은 힘이 있다. 게다가 천년을 비행하는 우주 범선 이야기라니! 귀가 솔깃하다.
이브 크라메르, 천재 괴짜 우주학자인 그는 환경오염과 전쟁, 기아, 폭력과 부도덕함이 난무하는 이곳, 지구를 떠나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가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숱한 비아냥과 격렬한 반대에도 나비 모양을 한 우주 범선에 14만 4천 명을 태우고 천년을 여행해 새로운 행성에 정착한다는 꿈같은 계획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현대판, 아니 미래판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마지막 희망, 파피용호는 지구를 떠나는 순간부터 결국 지구의 역사를 되풀이한다. 그래서 행성에 정착한 유일한 인류 아담과 이브의 대화는 우리를 움찔하게 한다. 언제고 사람들은 지구가 유일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일이 되풀이되었을지, 어딘가에 또 다른 지구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노골적이고 구체적으로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짙어가며 교훈어린 말을 하고 있는데도 식상하지 않고 심지어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대를 우주까지 넓혔기 때문, 친근하고 익숙한 소재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인류에 대한 따스한 시각과 종종 터뜨리는 베르베르식 유머가 여기에 힘을 더한다. 외딴 행성에 남녀 한 쌍 단 둘이 남았을 뿐인데도 사랑을 구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남자의 모습이라니, 베르베르가 아니라면 만들 수 없는 웃음이리라.
전작 《나무》에서 보여주었던 베르베르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파피용》에서 좀 더 구체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기본 얼개를 성경에서 가져온 것에서부터 이브의 아버지가 남긴 말 “빛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등 여기저기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제재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미물 하나 허투루 등장하는 것이 없다. 군데군데 숨겨놓은 소설적 장치를 찾아보는 즐거움을 위해 더 이상 말은 않겠다. 이 역시 베르베르가 독자들을 위해 남긴 재미일 테니 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07년,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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