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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편지로 쓴 철학사 탈레스에서 헤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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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쓴 철학사 탈레스에서 헤겔까지
이수정
아테네
2008.02.22

 

1.     <편지로 쓴 철학사>(이하 <철학 편지>)는 간결한 문체로 쓴 철학이야기이다. 통사별로 나눈 철학사, 각 인물들에 대한 간명한 설명과 글쓴이 이수정님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투사되어 있는 책이다.  <철학 편지>의 가장 큰 장점은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철학자들과의 만남이 자연스러워 쉬이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들과 구면인 셈이다.  <철학 편지>는 고대에서 근세까지, 탈레스에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모두 50명의 철학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철학은 어렵다는 인식을 다소 완화시키기 위해서 이수정님은 이 책의 집필의도를 밝힌다.  <철학 편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물론 일독으로 <철학 편지>에서 소개하는 많은 철학자들과 친해졌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을 안다 말하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많다.  인정해야 한다. 그저 면무식을 했다는 정도. 

      <철학 편지.는 헤겔에 이르기까지 334쪽의 지면은 글쓴이가 각각의 철학자에게 보내는 편지글이고 나머지 부분은 부록으로 철학사 주요 인물, 주요 저서, 철학개념등으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철학 분야에 있어서 초심자들에게는 입문서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편지글로 각각의 철학자에게 관심을 유발, 부록으로는 체계적인 철학 학습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철학에 관심은 있지만 심히 어려워하는 일반독자에게는 이만큼 친절한 입문서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수정 님은 차분하게 철학자를 소개하고 있고, 그의 편지글에는 철학자 1인과 그의 주요 사상을 간략하게 요약하며 글쓴이의 소감까지 담고 있다.


2.      철학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갖지 못하고 그저 경원이지할 뿐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들과 철학 사이에는 항상 그런 간격이 있었습니다. 그런 간격을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썼습니다. (...)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부분적으로 일반적인 경우와 해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른 해석' 또한 철학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하나라 생각하고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것이 곧 철학의 사유화인 것입니다. 나는 그의 철학을 이렇게 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나의 철학'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머리말 가운데서)


    '나의 철학', '철학의 사유화'라는 문구에서 절로 수긍하게 된다. 고개를 끄덕인다. 철학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도록 돕는 학문이 아니겠는가.  학문을 위한 학문, 글을 위한 글이 될 때 퇴폐가 곰팡이처럼 포자를 퍼뜨리게 된다는 것이 평소 내 생각이다.  거창하게 지론이라고 일컫는다.  글쓴이가 밝히는 '철학의 사유화'를 중심으로 해서 <철학 편지>를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삶을 위한 글', '삶에 근간을 둔 글'을 최고라 부른다.  그리고 '사람을 위한 글'일 때 진정한 가치를 얻는 것이 아니겠나 싶다.  고로 <철학 편지>를 읽는 동안 나는 서양화,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인간상을 중점으로 읽게 되었다.  현재 가장 문제 되는 것이 자연을 지배하는 사람, 독단과 독선이 아닐까.  지동설이 주창되고 자연보다 우위에 선 사람은 인간성까지 몰각하는 지경까지 내리꽂히고 말았다.  사람 목숨은 돈보다 못하다는 현실, 그것은 지극한 현실이다.  아니라 부정하고 싶지만 매일 조간에 인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건들, 비리 들을 떠올리면 착잡해지곤 한다.  불편하다.  언제부터 인간이 자연에서 동떨어져 나와 인간성이 피폐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찰, 나는 <철학 편지>에서 그와 같은 맥락의 철학자를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이것이 <철학 편지>를 읽는 동안 내가 한 '철학의 사유화'인 셈이다.

      당신을 대표하는 너무나도 유명한 명제 "존재는 지각이다"는 실로 자극적입니다. 이 말로써 당신은  모든 실체, 모든 대상의 외재적-객관적 실재성에 일정한 한계를 긋고, 그 모든 것을 지각-관념-표상-경험-정신이라는 주관적 존재로 환원시켜버리고 맙니다. (...) 인간중심주의적-주관주의적 사고가 오늘날의 자연파괴로까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균형의 철학', '조화의 철학', '공존의 철학'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입니다. (...) 나는 인간 '대' 자연이 아닌, 인간'과' 자연이라는 그 공동성, 연결성을 호소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실 주객의 관계가 아닙니다. (...)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보면, '안다'는 것은 '아는 나'와 '알려지는 그것'이 함께 어울러져야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하나의 현실입니다. (...) 주관과 객관은 각각 그 독자적인 존재성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양자의 필연적 연관성은 결코 간과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조화들이 모이고 모여 우리들의 이 우주가 구성되어 있음을 부디 거시적으로 지각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버클리에게 존재와 지각을 묻는다/ 265~270쪽)

     나는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이 우주의 근본 실상을 이해, 설명하고자 한 당신의 형이상학적인 노력을 당신이 발견한 미적분법보다도 훨씬 높게 평가합니다. (...) 쉽지 않더라도 미적분이 필요하듯이 역시 쉽지 않더라도형이상학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초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능력이 그것을 담당해야 합니다. (...) 모든 것이 각각 '그것으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의 결합에서 세계가 성립합니다. (...) 만물들은 모두 그렇게 서로 얽혀 타자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라이프니츠에게 최선의 세계를 묻는다/297~299쪽)

     형이상학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못난이가 아니었습니다. (...) 철학이 어설프게 수학과 과학의 흉내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근세의 안경을 벗으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본래 탐구와 이해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노래와 경탄과 사유의 대상으로서 철학과의 만남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칸트에게 인식을 묻는다/ 316쪽)

     물론 내가 읽은 <철학 편지>는 내가 읽고 싶은 부분만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세상 어떻게 얽히고설켜 있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각각의 유기체가 평화공존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자문하고 되묻고 따지면서 읽었다.  <철학 편지>의 글쓴이 이수정 님의 주장은 일면 평소 내가 가진 생각에 교접하는 부분이 많았던 점, 그래서 나는 더욱 심취해서 읽고 밑줄을 그었던 것이다.  비록 완벽한 이해는 아닐지라도 나는 글쓴이의 생각들에 많은 부분은 공감한다.   그것을 나는 공생공존론이라고 달리 부르고 싶다.


3.      50인의 철학자들 다루기에 이 책의 지면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수정 님은 편지글 같은 서술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글쓴이의 생생한 목소리, 그리고 수신자는 내가 아니라 해당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마치 남의 편지를 훔쳐보는 듯한 긴장감까지 느끼게 된다. 훔쳐보기의 욕망이라고 할까. <철학 편지>의 수신자는, 그러나 일반 대중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소개되는 다양한 철학자 모두를 이해할 수는 없다. 더 깊이 있는 글읽기, 철학 공부를 위해서는 계획하고 정리하며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철학 편지>는 서양 철학사의 거목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우리가 철학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맛나는 글읽기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으로 우선 충분하다. 그것으로 <철학 편지>는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