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상상해본다.
아니 기억해 본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객창감과 들뜬 마음에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본다.
한창 여행할 때 낯선 곳에서의 아침은 그런 느낌이었다. 익숙함의 주는 안락함보다 호기심이 주는 짜릿함과 낯선 무엇이 아침을 깨운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느낌이다. 그것도 한낱 천장에서 느끼는..
천천히 데워지는 냄비 속의 개구리를 아는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물이 따뜻해지면 개구리는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따뜻해지는 물속에서 안락감을 느끼며 익어간다. 많은 자기개발서에서 인용하는 우화이다. 이 우화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호랑이에게 물려가듯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까? 책을 읽으며 고매한 정신을 가져야 할까?... 전부 틀렸다. 개구리가 살아남는 길은 물의 온도가 변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시리도록 차가운 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fry or jump?
적어도 나는 개구리이다. 우물 안에 갇혀 있으면 우울을 세상으로 동일시 하며 냄비 속에 갇혀 있으면 나도 모르게 익어나간다. 그것이 인정해야 되는 본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환경과 느낌이며 객관성인것 같다. 그러한 환경과 상황을 선택할수있는 개구리가 되어야 하는것은 그것이 잘날 것 없는 개구리의 일상이며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의 아침, 구본형 작가의 글은 담담하고 도도하며 격이 있었다. 작은 일상 속에 흐르는 강줄기처럼 잔잔함의 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 밑 바닥속의 소용돌이에 비견되는 욕망과 일상도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강물은 제 색깔을 찾는다. 탁류도, 청류도 아닌 그것은 강물의 온전한 흐름의 일상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조언은 본연의 색깔을 가지고 일상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흑백의 두 갈래길에서 벗어난 천연색의 색깔로 매섭게 또는 잔잔하게..
그리고 그는 일상의 죽음을 독촉한다. 일본의 카이젠도, 시그마식스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오직 결별이다. 그것은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이 책에서 왜 혁명이 실패하는지, 왜 개선이 어려운지를 불과 물에 비유하여 이야기 하기도하고 음주와 흡연과 기름진 음식간의 상호관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것은 일년마다 죽는 연습을 하는 나무의 이야기였다. 찬란한 봄을 위해 나무는 전략적으로 죽고, 자신의 모든것을 내어 놓는다. 그리고 찬란하게 다가오는 봄 그 생명력을 발산한다. 이처럼 죽음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 비유 속에서 나의 일상과 개선이 매일 굴러내려오는 돌을 밀어올려야 하는 시지프의 신화에 갇혀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저자가 그랬듯 그 형벌은 결별과 그 틀의 부숨을 통해서만 벗어날수 있을것 같다.
하지만 결별은 공허함 또한 수반한다. 그것은 묶여져 있던 어떤 것을 떼어 놓는 것이며 진한 피냄새까지 풍겼다. 깨끗한 절단면을 기대해서도 안되며 적어도 살점 몇 점은 떨어져 나가는 각오가 필요하다. 더 이상 이어나가지는 못하는 연애의 마지막처럼 필연적으로 다가올 시린결별은 그 무엇을 나뭇잎처럼 사멸시킬것이고 비어버리게 만들것이다.
그래서 그때쯤 어쩌면.... 아니 비로써 꿈꾸며 느낄 수 있을것 같다. 일상의 황홀을……
저자가 함께 느끼고자하는 그 황홀을...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항해자(grayr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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