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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감상]

검은 표범 여인

표범 약국

청담동 표범약국에는
표범약사가 있지
멸종된 줄로만 알았던 표범약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인터넷을 하다가
귀찮은 듯 안약을 카운터에 슬쩍 밀어주지

호랑이 연고도 팔고
무당거미의 독이 든 마취제도 팔지만
새끼 표범 침으로 만든 구강 청결제라든가
호피로 만든 무좀 양말 따위는 팔지 않아

인간의 욱체를 포장해 온 무수한 환상을 제거하고
오로지 생물학적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맹수의 공격 본능으로 학살을 일삼고
모피를 찬양하며
발정제를 사러 약국에 가지

이 겨울 다국적 패션 거리에는
베링해 섬 출신의 부극여우 털로 만든 재킷이 있고
덫에 걸리면 다리를 자르고 도망간다는
밍크쥐의 가죽을 수백 개 이어 만든 코트가 있지
내가 만약 난파선의 선원으로
북극여우의 섬에서 겨울을 보내게 된다면
내 격랑을 팽팽하게 껴안은
이 무용한 거죽으로 깃발이라도 만들어 흔들어야 하나

물어 버리기 위해
이빨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이빨이 없어서
물지 못하는 것이라고
청담동 표범얏사는
밤이면 긴 혀로 유리창을 핥으며
우아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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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인 문혜진은 퇴화된 인간 감각이 놓친 것들, 몸이 곧 감각인 파충류의 피부, 정지 비행하는 매의 눈과 자신의 영역을 돌며 평생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맹수의 근성으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변화 발전하는 시인으로 살겠다고 한다.
들풀 씨앗을 털가죽에서 채 떨어내지 못하고 신나게 달리는 들고양이 같은 그녀의 시와 시어는 자유롭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가슴 시원하기도 하다.
2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인 이 시집은 김수영 시인이 만족스러워 했을 만한 시집이 아니었을까.(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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