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긍정의 파이터다
인상깊은 구절
허리와 무릎통증 때문에 21살의 한창 나이에 권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희성씨, 그는 고교 3학년때 프로로 데뷔하여 신인왕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권투가 전부였던 그는 부상으로 세계챔피언의 꿈이 날라가자, 술에 빠져 한때 알콜중독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절망과 시련을 극복하고 기업체 및 관공서 등에 출강하여 컨디션트레이닝이라는 독특한 분야에서 명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컨디션트레이닝 강의란 몸을 회복시켜 주는 운동일뿐만 아니라 호흡과 명상을 통해 마음에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 넣는 심신회복운동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이라는 꿈을 꾼다. 타인의 성공사례는 내 꿈의 달성에 유익한 길잡이가 된다. 고졸학력과 알콜중독이라는 장애물을 뛰어 넘어 억대 연봉강사로서 성공적인 활동을 펼치는 그의 인생역전기를 들추어 본다.
권투는 나의 사랑
동양챔피언 출신인 이모부를 보면서 그는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장남이라며 그의 부모님은 극구 반대하였다.
중학교 2년때 친구와 의기투합하여 그는 가출을 했다. 부천 신문보급소에 취직하여 돈이 모이면 권투체육관에 등록할 심사였다.
그러나, 너무 힘이 들어 일주일만에 귀가하고 만다.
1년 재수끝에 영동고교에 진학한 후, 공부한다며 학원등록비를 받아 부모 몰래 권투체육관에 등록했다. 부모님도 이를 눈치챘지만 가출이 두려워 내버려두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좋아하고 하고 싶은 운동이라지만, 단기간에 도가 지나친 훈련은 화가 되는 법이다. 반복되는 고된 훈련으로 몸에 무리가 왔다. 아침에 눈뜨면 일어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아이도 태어나서 뒤집고, 기고, 서고, 걷는 과정을 거친다. 욕심이 앞서 그는 걷기도 전에 뛰어 버린 꼴이었다. 잘못된 훈련이 오히려 그에겐 독이 되고 말았다. 이후 허리통증은 그의 선수생활 내내 그를 괴롭히고 만다.
1981년 2월 고교 2학년때 데뷔전을 치루었다. 첫 출전에 상대를 보기좋게 KO로 물리쳤다. 그러나, 이후 성적은 연속 패배로 전적 6전 1승 5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다. 나름 패인을 분석한 결과, 복싱 시작이 겨우 1년 정도인지라 절대 연습량이 부족했고, 근성과 체력이 부족하며, 난타전 위주의 아마츄어 경기는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준비를 시작했다.
프로선수로 다시 출발하다
우선 체력강화에 주력했다. 겨울방학 2달간 동네 뒷산을 매일 아침 전력질주로 뛰어 올랐다. 갈수록 체력이 향상됨을 느꼈다. 그런데, 운동후 허리와 무릎이 조금씩 아파왔다. 목표와 실천은 훌륭했지만 방식이 나빠 결국 자신을 해치는 노력이 된 것이다.
1982년 2월 부산에서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판전승으로 장식했다. 두번 째 경기는 전라도 광주에서 급히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체중 감량에 실패하면서 신나게 얻어 맞고 판정패했다.
5월, 제 2회 KBS 프로복싱 신인 선수권대회에 페더급으로 출전하여 오른손 주먹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고서도 결승에 진출했다.
7월 31일 오후 4시에 열림 결승전은 전국에 생방송되었다. 상대선수를 3번이나 다운시키며 KO승을 거두었다. 1승 5패 전적의 아마츄어 출신이 프로 신인왕이 된 것이었다. 참고로, 이 대회에서 플라이급 신인왕은 전 세계챔피언 유명우였다.
4개월 후 11월엔 국제경기를 가져 태국선수를 KO승으로 이기며 거칠 것이 없었다.
하루 아침에 주위에서 유명인으로 부추기자 오만해졌다. 겸손해야 하기엔 너무 어린 탓이었다. 필연적인 결과가 뒤따랐다.
대학 툭기생 입학원서에 부모님 동의 도장을 받아 오라는 선생님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 자신을 몰라 보냐며 원서를 찢어 버리는 안하무인 행동을 한 것이다. 대학을 포기한 결과로 이후 그는 유흥가의 검은 손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권투를 포기하다
고교졸업후 1983년 3월 마산에서 10라운드 경기가 잡혔지만 허리통증으로 시합 2주 전부터 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경기 당일 무리한 체중감량을 한 채 링위에 올랐으니 결과는 뻔했다. 3라운드에 경기를 포기했다.
이후 무릎과 허리디스크 교정치료후 통증이 없어지자 훈련을 재개했다. 그러나, 1주일만에 통증이 재발했다. 병원과 한의원을 오가며 치료하는 동안 체중이 62킬로그램에서 80킬로그램으로 불어났다. 결국 허리와 무릎통증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권투를 포기했다.
친구가 웨이터로 일하는 술집에서 공짜술 마시며, 외상술값 받으러 다니는 일이 그의 주된 일이 되어 버렸다. 회수한 외상값의 20%를 수수료로 받았지만 이 또한 술값으로 모두 날렸다. 영화 [록키]의 주인공 발보아처럼 건달 일을 하면서 그는 서서히 알콜중독자로 변하고 있었다.
군 입대와 전역, 그리고 술버릇
자기 파괴적인 생활에서 벗어 나고자 그는 입대를 결심했다. 허리통증의 소견서만 첨부하면 사실 그는 군면제 대상이었다.
술 버릇은 군에서도 여전했다. 수차례의 해프닝을 연출하며 술로 시작한 군 생활이 술로 끝이 났다. 술을 끊겠다고 입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 결국은 3년이란 세월을 허송한 셈이었다.
군 제대후 권투영화의 주연배우를 보조하는 일에 종사했다. 촬영이 끝나고 쫑파티하는 날, 기어히 일을 내고 말았다. 감독에게 행패를 부린 것이다. 다음날 아침,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은 이렇게 번번히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자살시도, 그리고 또 다른 출발
10월 어느 날, 신세를 비관하고 올림픽대교에서 한강으로 투신했다. 차가운 물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들어 죽을 힘을 다해 한강둔치로 헤엄쳐 나왔다. 이후 뭐라도 해야 겠다는 마음에 조계사 연수원에서 석달간 지압도 배우고, 얼치기 테니스 강사도 했다.
1988년 나이 25살에 건강식품대리점을 개업했다. 아버지는 마천시장 그릇가게를 폐업하고 사업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다시 자포자기 상태가 되면서 술에 의지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술김에 옆집 치킨 가게 네온사인 간판을 부수며 난동을 부렸다. 다음날 술이 깨자 너무 창피했다. 50만원을 들고 가출했다. 부산 태종대에서 놀다가 강화도로 갔다. 어버이날 강화도 터미널에서 수면제 20알을 구입했다. 소나무 아래에 앉아 소주를 들이키고 수면제 20알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시간이 가도 잠이 오질 않았다. 다음날 약국에 들러 화풀이하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면 해결책이 보이는 법이다. 우선 허리와 무릎통증 치료에 전념했다. 한국자연건강회에서 식이요법과 교정운동을 하면서 내친 김에 지도사 1급 자격증도 취득했다. 이후 안양에 있는 안현필 선생의 체질개선연구회에서 강좌를 수강했다. 자세교정운동을 통해 허리와 무릎통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래서, 기공, 단전호흡, 요가, 명상호흡 등 여러 수련원을 다니며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1990년, 운동공학 피지컬트레이너 자격 취득을 위해 2년 과정을 시작했다. 자격은 취득했지만 프로구단이나 국가대표팀의 트레이너로 취업하기에는 고졸학력으로 힘에 겨웠다. 좌절보다는 해결책을 찾았다. 졸업한 영동고교 핸드볼 선수에게 피지컬트레이닝을 실시했다. 만성 허라통증으로 고생하던 한 선수가 3일간의 집중치료로 효과를 보자, 그 선수의 어머니가 고맙다며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후 이 선수의 어머니도 허리가 아프다며 치료를 요청해서 친구분들과 함께 치료해 주었다.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고 3 여학생도 효과를 보면서 입소문이 나자 고객이 많이 생겼다.
건강교실을 오픈하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1993년 송파구 오금동에 <바른자세 건강교실>을 오픈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운영이 되질 않았다. 신문에 실린 약수터 사진을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라 매일 아침 약수터에서 홍보전단지를 전하며 몸푸는 방법을 가르쳤다. 매일 회원이 증가했다.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일손이 달려 트레이너와 여사무원도 채용할 정도였다.
술로 인해 예약손님과의 약속을 못지키는 일이 종종 생겼다. 이를 불평하는 손님은 발길을 끊었다. 그래서, 1994년 5월부터 단주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96년 3월 10일 마지막 잔으로 완전히 술을 끊었다. 13년 째 술은 입에도 안댄다.
IMF 여파로 건강교실 운영이 어려웠다. 연세대 야구부 트레이너도 잠시 맡아보고, 아리랑축구단의 무보수 트레이너를 자청하기도 했다. 어느 날, 영화계의 김영성 이사가 말솜씨가 재미있다며 강의를 해보겠냐고 물어왔다. 첫 강의 준비를 위해 한달 동안 밤을 새며 "컨디션트레이닝"이란 강의안을 준비했다.
드디어 강의를 하다
수원 컨트리클럽에서 1시간 30분짜리 강의였다. 건강상식 30분, 몸풀기체조 1시간으로 강의를 구성했다. 부담 탓으로 강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준비해 간 강의안을 무시하고 운동장이나 약수터에서 했던 것처럼 서로 즐기는 강의를 했다. 평가가 좋았다.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두번 째 강의요청이 들어왔다. 백화점 판매원 대상이었다. 매일 1시간씩 65회차 강의였다. 집중과 공감, 이 두 가지가 강의 성공의 열쇠이다.오늘도 이런 멘트로 강의를 시작한다.
"여러분, 저는 고교때 권투한다고 공부는 너무 안했어요. 전교 꼴지는 아니고 2등, 뒤에서! 나보다 못한 놈이 다행히 한 명 더 있었어요"
휴일마다 강의 소재를 위해 대학로에서 개그콘서트를 관람하며 재치있게 말하는 방법을 벤치마킹하고 집에선 거울을 보며 수없이 반복연습을 한다. 그래서, 건강교실과 강의를 병행하는것이 힘에 부쳤다. 고민끝에 건강교실은 문을 닫았다. 월 80만원의 강의 수입이라 오후엔 건강벨트를 만들어 일산 학원가를 돌며 팔기 시작했다. 건강벨트는 공부할때 집중력을 높여준다. 개당 겨우 300원을 버는 일이었다. 재개발지역 철거용역팀에 들어오면 1년에 1억원을 주겠다는 주먹계 친구, 대기업 임원 월급을 주겠다는 유흥업소 주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떳떳하게 벨트를 팔러 다녔다. 다행스럽게도 백화점 강의 요청이 뒤따랐다.
명강사 42호로 위촉되다
그의 10년후 목표는 요가, 명상, 권투를 응용한 건강체조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컨디션트레이닝 센터를 건립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을 뒤로 미루고 그는 명강사가 되겠다는 목표에 도전했다. 월 80만원을 받던 초보강사가 월 일천만원을 받는 특급강사로 성장했다. 2006년 2월, 교육인적자원부 산하 사단법인 강사협회에서 선정하는 명강사 42호로 위촉받았다.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을 갈고 닦아,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우리는 성장을 하게 된다. 의지를 갖고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 찬란한 희망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꼴찌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지만, 꼴찌에만 머물러 있고 벗어 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살아오면서 배웠다"는 그의 말이 오랫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폰 잔폰 짬뽕 (0) | 2009.12.31 |
---|---|
바보사장의 머릿속 (0) | 2009.12.30 |
로봇이 인간이 될수 있을까 (0) | 2009.12.24 |
웃으면서 이기는 바보의 비밀 (0) | 2009.12.23 |
그린 패러다임 (0) | 2009.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