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에덴의 악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에덴의 악녀
페이 웰던
쿠오레


     메리피셔는 등대탑에 산다. 거기에서 환상적인 연애소설을 쓴다. 자신이 쓰는 연애소설 같은 사랑도 한다. 메리피셔는 잠자는 숲속, 아니 등대탑의 공주다. 공주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

     루스는 에덴 그로브에 산다. 어느 집이나 넓은 마당에 푸른 잔디가 깔려 있고 반짝거리는 통유리창이 있다. 에덴 그로브에 살고 있는 여자들은 잔디에 물을 뿌리고 커다란 유리창을 닦아낸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연출하며 자신이 천국에 살고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여자의 임무란 모름지기 주어진 시대, 주어진 가정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이면, 반짝이는 유리창 너머에는 노랗게 시들어가는 일상이 있다. 검푸르게 얼룩진 고요한 폭력이 있다. 자신을 기만하는 일에 실패한 여자들은 지하 주차장이나 증기 어린 욕실에서 목을 맨다. 천국에 살아남은 여자들은 꿋꿋하게 잔디에 물을 뿌리고 커다란 통유리창을 닦는다. 루스도 그랬다. 그랬었다. 남편 보보가 등대탑의 공주에게 떠나버리기 전까지는. 떠나면서 “당신은 악녀야!”라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당신은 최악의 여자야. 사실 여자라고 할 수도 없어. 당신은 악녀야!”

     남편의 그 한마디는 루스 안의 악녀를 일깨웠다. 천국의 현실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천국을 지탱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에 실패한 다른 여자들은 목을 매고 죽어갔지만, 루스 안의 악녀는 서서히 살아나고 그 생명력은 걷잡을 수 없는 복수심을 부추긴다. 지긋지긋한 천국에, 그 꿈같은 집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루스의 복수는 시작된다. 개를 죽이고 아이들을 버린다. 루스가, 아니 루스 안의 악녀가 불태워버린 것은 집뿐이 아니었다. 아이 엄마 루스, 보보의 아내 루스. 여자 루스.

곰은 밤의 어둠 속으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왔다. 그 중간에 곰우리가 놓여 있었다. 우리의 문이 열려 있는 것도 무시하고 곰은 그냥 지나쳤다. 사람들은 곰우리야말로 곰이 좋아하는 곳이라고, 곰에게 편안한 집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데......

     ‘여성’이라는 우리에서 탈출한 루스는 그러나 사회적 통념과 편견이라는 우리에 갇힌다. 그 우리의 환경은 ‘여성’을 강요한다. 강요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육하고 창조한다.

나는 운명 따위는 믿지 않는다. 하느님도 믿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이 정해놓은 대로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작정이다. 나는 비록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일지라도 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리라. 창조주에게 반역하고 나 자신을 다시 만들리라.

     여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편견이라는 우리. 그것이야말로 여성의, 루스의, 에덴의 악녀의 운명이다. 루스는 이 운명에 반역하고 스스로를 새롭게 창조한다는 ‘꿈’을 꾸고 있지만 결국 이 우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메리피셔의 사진을 들고 성형외과를 찾아가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 탄생한 미녀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여성적’ 아름다움의 산물이다. 또 하나의 메리피셔는 사회적 통념이 낳은 것.

     루스, 복수심에 불타는 악녀는 메리피셔의 등대탑, 그 꿈의 궁전을 붕괴했다고 믿는다. 메리피셔의 달콤한 꿈에 무서운 현실을 끼얹어 메리피셔를 죽였다고 믿는다. 그야말로 통쾌한 복수를 했다는 믿음은 그러나 루스의  자기기만에 불과했다. 루스의 복수극은 결국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왜 나는 메리피셔처럼 ‘여성적’이지 못한가. 천국에서 쫓겨났는가. 그러면 나도 메리피셔가 되어야지. 사회가 인정하는 ‘여성적 조건’을 갖춰야지. 점점 메리피셔가 되어가는 루스의 모습은 무섭도록 참혹하다. 루스, 에덴의 악녀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통념, 그 우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못할 것이라는 씁쓸한 결론.

     루스가 불태웠던 것은 무엇이고, 불태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불태웠던 것은 자기 자신. “185센티미터의 키에, 다리에는 군살이 자글자글한” 루스다움. 그뿐이었다. 불태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메리피셔의 ‘등대탑’. 천국 이면의 고요한 횡포를 고스란히 견뎌내야 하는 여성의 삶. 또 하나의 메리피셔가 된 루스, 에덴의 악녀는 그러나 등대탑을, 그 지긋지긋한 천국을, 이상理想을 끝내 불태우지는 못했다. 사회라는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 그 우리로 들어가 메리피셔가 되었다.

     심각해져버린 “한판의 희극”은 끝나지 않았다. 사회는 또 다른 메리피셔를 사육, 창조하고 있다. 천국을 불태우던 맹렬한 불꽃, 그 ‘불놀이’ 뒤에 남은 것은 검은 연기뿐. 천국은 불타지 않는다. 메리피셔도 죽지 않는다. 메리피셔의 등대탑도 무너지지 않는다. 세상 변했다지만 아직도 이런 소설이 쓰이고 읽힌다는 것. 이런 소설로 또 다른 메리피셔들은 대리만족을 느끼리라는 것을 생각한다. 내 안의 악녀가 꿈틀거린다. 악녀는 등대탑에서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메리피셔(들)를 깨우러 간다. 똑똑똑. 누구세요? 에덴의 악녀입니다.

by 북카페 책과 콩나무 - 망각의혀(gray_shoes)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악하악  (0) 2008.07.11
무일푼 청춘 고물장수로 12억 벌기  (0) 2008.07.11
런던나비  (0) 2008.07.08
업무의 신 기본  (0) 2008.07.08
그림으로 30억을 번 미술투자의 귀신들  (0) 2008.07.08